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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북한은 비핵화 의지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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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바이든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 특히 북한 핵문제 대응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북 정책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지는 정책 우선순위, 북한이 요구하는 안전보장의 수용 수준, 그리고 대북 설득을 위한 중국의 협조 확보 여부로 판명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사정상 우선순위는 기대만큼 높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카드도 제한적이며, 전략적 대립 상태의 중국과 타협할 여지도 좁아 보인다.

핵 완성한 북한은 이란과 달라 #한국, 선택지 확보에 진력해야 #핵옵션 유지는 협상위상 키우고 #중국의 대북 설득에도 도움될 것

바이든 행정부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오바마 행정부는 국제 분쟁의 능동적 해결보다는 수동적 대응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북핵에 대한 ‘전략적 인내’는 물론,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축조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에 대한 대응이 그 사례들이다. 지금 미국이 쓸 수 있는 수단은 그때보다 더 줄었다.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하지만 ‘오바마 시즌 2’의 우려도 있다. 자칫 4년 후 한국이 더 굳어진 북핵을 머리에 이고 있을 모습이 어른거린다.

북핵 대응에 새로운 시도가 더욱 절실해진 나라는 한국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안전보장을 전제로 한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하염없이 반복한다. 정부는 먼저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와 ‘안전보장’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북한의 비핵화 의지’만을 강조한다면 ‘진실의 일부’만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보다 못할 수 있다.

북한 지도자와 협상가들은 ‘조선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임을 주장해 왔다. 요약하자면 조선반도 비핵화란 남·북 공히 핵우산을 없애는 것이고, 안전 보장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제재 해제와 북·미 외교관계 수립, 경제적으로는 재건 지원, 군사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하라는 것이다.

우선 이 조건들이 충족 가능한지를 살펴봐야 한다. 북·미 외교관계 수립과 제재 해제는 핵 폐기에 맞추어 진행 가능하다. 경제 지원도 한국 주도로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 문제는 북한의 안전보장 차원을 넘어선다.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와 세계 질서에 파괴적 지각변동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주한미군의 존재에 대한 북한의 명시적 동의를 받으면 ‘비핵화 의지가 확고함’을 입증하고, 핵 협상도 간명해진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일관되게 반대하면서 미군 철수를 요구한다. 충족 불가한 조건을 내거는 북한을 다독거려 비핵화와 평화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북극성을 좌표로 노를 젓는 사공이 실제로 북극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과거 북한이 핵 개발 단계일 때는 협상을 통한 속도조절을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은 2017년 말 핵보유국 문턱을 넘었다. ‘에덴의 동산’ 전과 후만큼이나 판이 바뀌었다. 이를 직시한 바이든 팀은 취임 전부터 북핵을 폐기가 아닌 축소 대상으로 설정했다. 미국은 2015년 이란과의 협상경험을 원용하여 4자 또는 6자 방식으로 북핵을 관리하고자 할 가능성이 있다. 핵을 완성한 북한은 핵을 시도 중인 이란과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북핵 아래 선 한국의 처지가 더욱 초라해지기 전에 선택지를 확대해야 한다.

첫째, 협상의 국면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를 전제로 주한미군 문제를 제외한 정치·경제적 안전보장 조건을 과감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 폐기를 거부할 경우, 다음 단계의 행동을 위한 명분을 축적하는 것이다.

둘째, 미국 핵우산의 신뢰성 강화를 위해 핵 공유 방안을 세워야 한다. 아시아판 ‘핵계획그룹’설치도 포함된다. 물론 전술핵을 재배치하더라도 나토의 경우에서 보듯이 최종 키는 미국이 갖기 때문에 한계는 있다. 그래도 상징적 효과는 있다.

셋째, 독자 핵능력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당장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한 후의 선택지로 갖고 있어야 한다. 핵의 민수용과 군사용 사이에는 방화벽이 얇다. 과학자 양성과 연구 증진 같은 토양 조성이 필요하다. 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으면서도 두터운 핵 인력과 재처리 및 고농축 시설을 각각 갖추고 있다.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국이 탈원전 캠페인으로 시설을 해체하고 연구 환경을 위축시키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

한국의 핵 옵션 유지는 당사자로서의 협상 위상을 키우고, 북·미의 협상자세와 중국의 대북 설득도 자극할 것이다. 스스로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안보 성인’으로서 국가의 기풍에도 중요하다. 이처럼 확대된 선택지들은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협상을 하면서도 판을 크게 벌이는 병행전략이 요구된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번은 다르다는 자만(hubris), 남·북이 민족 정서로 뭉치면 된다는 도취(euphoria), 실패의 기록들을 직시하지 않는 기억상실(amnesia)이 다분히 작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흔히 이런 심리 상태가 겹치는 것을 ‘위험한 배합’이라고 한다. 정부가 남은 기간에 해야 할 일은 이 배합에서 벗어나 한국이 가야 할 선택지를 확대하는 데 진력하는 것이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