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선

21세기판 막걸리와 고무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에디터

최민우 정치에디터

가덕도 신공항으로 침체한 부산 경제가 되살아난다면 28조원이 아니라 100조원을 써도 된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 거듭 확인된 과학적 검증은 가덕도 신공항은 짓기도, 유지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2016년 파리공항공사의 타당성 검토에서도 가덕도는 김해·밀양에 비해 점수가 한참 뒤진 꼴찌였다. 수심(水深)이 깊어 공사비가 많이 들고,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항공기 이착륙 등 안전성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럼에도 “노무현의 꿈”이라는 ‘신화’를 만든 좌파의 선전선동과 “당장 표가 급하다”는 우파의 부화뇌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가덕도를 다시 부활시켰다.

정치권 폭주와 야합 속 탄생한 #가덕도법은 교묘한 선거 매수 #깨어있는 시민이 심판에 나서야

①관료의 기회주의=가덕도 신공항이 수면 위로 부상한 건 지난해 11월 김해신공항(김해공항 확장) 검증위 발표 직후였다. 검증위는 내용의 80% 이상을 ‘기존 계획에 큰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정작 결론에선 느닷없이 30년뒤 여객 수요를 거론하며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권은 기다렸다는 듯 ‘김해 백지화-가덕도 추진’으로 몰고 갔다. 검증위가 부랴부랴 “백지화 아니다”라고 했지만 면피용이라는 평가였다.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등을 담은 특별법에 대해 정부는 반발했다. 특히 국토부는 부산시 예측(7조5000억원)보다 4배 가량(28조6000억원) 예산이 더 들며, 심사 과정에 절차적 하자가 있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국토부 차관은 25일 국회에 나와 “주무 부처로서 최선을 다해 집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보고서 등은 훗날 법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②여당의 매표 중독=민주당은 선거용이 아니라고 했지만, 법이 통과하자 이낙연 대표는 “가벼운 마음으로 선거에 임하게 된 김영춘·박인영·변성완 (부산시장) 후보께 축하드린다”고 했다. 신공항은 2030년 완공이 목표다. 단지 4·7 재·보선용이 아니라 내년 대선을 넘어 향후 10년간 가덕도 이슈를 끌고 갈 것이란 전망이다. TK·PK 갈라치기에 제격이란 얘기다. 2일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도 가덕도에서 연다.

특별법은 군사시설보호법·물환경보전법 등 31개 법령을 무력화시켰다. 각종 인·허가, 승인 절차를 건너뛸 수 있게 했다. 가히 역대급이다. 여당에서조차 “동네 하천 정비도 그렇게 안 한다”(조응천 의원)는 말이 나왔다.

③야당의 야합=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박성훈·박형준·이언주) 중에 가덕도 신공항을 반대한 이는 없었다. 법이 통과하자 다들 환영 성명을 냈다. 당 지도부도 오락가락했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는 우파에게 퍼주기란 배척해야 할 이념이다. 하지만 선거 앞에서 잔뜩 몸을 사렸다. 가치를 저버린 정치 세력이 집권할 리 만무하다. 운 좋게 잡았다 한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처럼 질질 끌려다닐 공산이 농후하다.

이승만 정부 후반기인 1950년대말∼1960년대초 선거 유세장은 대개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플라타너스 그늘이 드는 철봉 주변으로는 으레 막걸리판이 벌어졌다. 보릿고개 시절 후보자가 주는 막걸리 한잔, 고무신 한 켤레에 혹했던 건 어찌보면 인지상정이었다. 그렇게 선거 매수의 흑역사는 막걸리·고무신에서 현금 봉투를 거쳐 이제는 교묘한 포퓰리즘으로 진화했다. 다른 건 그때는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몰래 숨어서 했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알았다. 지금은 뻔뻔하게 대놓고 한다.

그러니 대통령이 선거 41일 전, 법안 통과 전날 가덕도에 내려가 “가슴이 뛴다”며 국토부 장관에게 “의지를 가져라”고 질책해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4차 재난지원금을 논의할 때가 아니다”라고 해놓고 한달 만에 5차 재난지원금에 해당하는 “국민 위로 지원금을 주자”며 말을 바꿔도 상관없는 것이다. 선거만 이길 수 있다면 국민 세금을 제멋대로 살포해도, 국가 시스템을 무너뜨려도, 괴물 같은 법을 만들어도 관계없는 것이다. 이를 조금이나마 제어할 정부 조직도, 정치 집단도, 시민 세력도 사라졌다. 국가의 타락이다.

이런 게 민주주의인가. 짙은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다. 일찍이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이렇게 설파했다. “민주주의는 영속되는 법이 없다. 곧 쇠퇴하고 탈진하고 자살한다. 이제껏 자살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없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인가. 기댈 건 깨어 있는 시민의식밖에 없다. 결국은 선거다. 70여년 전 막걸리·고무신을 돌릴 여유가 없던 야당 후보는 연단에 올라 이렇게 소리쳤다. “유권자 여러분, 막걸리는 사양 말고 마시되 표는 딴 사람을 찍어야 합니다.”

최민우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