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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같은 파편 맞춰, 왕비의 금동신발 46년 만에 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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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수십년에 걸친 연구와 복원 끝에 거의 완전한 형태를 되찾은 무령왕비의 금동신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수십년에 걸친 연구와 복원 끝에 거의 완전한 형태를 되찾은 무령왕비의 금동신발.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인문학자들이 자연과학적 현상에 무감했다. 돌로 만든 거면 영구불변할 것 같고. 그런 상황에서 무령왕릉에서 금제, 철제는 물론 부서지기 쉬운 목재 유물까지 우수수 나왔으니 부랴부랴 보존대책을 서두를 수밖에. 만고불변의 문화재란 게 없구나, 알뜰살뜰 보살펴야 하는구나 하는 인식이 강화될 수 있었다.”(서정석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무령왕릉 발굴 50년 〈③·끝〉 #유물 제작기법, 산지 추정작업 등 #첨단장비 동원해 속속 알아내 #목관 수종이 일본 자생 금송이고 #당시 제상에 은어 올린 것도 확인 #보존과학 통해 문헌 연구 뒷받침

1971년 7월 약 1500년 만에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백제 무령왕릉은 발굴 후에도 여러 과제를 안겼다. 당장 눈에 띄는 국보급 유물들은 응급 보존조치를 거쳐 전시회까지 열었지만 쌀포대(가마니)에 쓸어담다시피 한 바닥 잔존물과 자잘한 유물들은 외면당했다. 이들은 공주박물관으로 옮겨진 뒤 유물상자에 나눠 보관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1992년 학예연구사로 임용돼 처음 가보니 수장고 한쪽에 먼지 쌓인 상자가 여럿 있었다. 알고 보니 무령왕릉 유물이었다. 새로운 기술로 밝혀낼 게 많다 싶어서 발굴 30주년 즈음해 후배 학예사들을 독려했다”고 회고했다. 이 성과들이 쌓여 2009년부터 업데이트된 신보고서가 발간됐다(현재까지 총 6권).

대표적인 성과가 왕비의 금동 신발이다. 왕비의 발치에서 나란히 발견된 한 쌍은 출토 당시 뒷부분이 파손돼 앞부분만 남아 있었다. 젊은 학예사들이 잔존물 속 깨알 같은 파편들을 모아 한 땀 한 땀 끼워 맞춘 덕에 2017년 현재 모습으로 복원됐다. 특히 미세하게 남아있던 직물 연구를 통해 금동 신발 안에 금사(金絲)를 엮은 신발을 별도로 신었던 것도 입증됐다. 최근 전북 고창과 전남 나주에서 각각 출토된 백제 금동 신발 2건이 처음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되면서 삼국 특유의 금동 신발 장례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왕비 신발은 1971년 발굴 당시 양쪽 모두 뒤꿈치가 부서진 채 발견됐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왕비 신발은 1971년 발굴 당시 양쪽 모두 뒤꿈치가 부서진 채 발견됐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으로 무령왕릉 연구는 보존과학자의 몫이다.” 발굴 5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 11월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한 말이다. 그는 “유물의 제작기법과 산지 추정 작업 등 보존과학자들의 성과가 두드러지고 있다”면서 대표 사례로 용문환두대도(용·봉황무늬 고리자루 큰칼)를 꼽았다. 왕의 허리춤에서 나온 이 대도는 오랫동안 중국 남조(南朝)에서 온 하사품으로 추정됐다가 일본 학계 분석에 의해 백제산 가능성이 제기됐다. 2010년대 들어 국내 연구진도 추가 분석을 통해 이를 뒷받침했다.

왕비 신발은 1971년 발굴 당시 양쪽 모두 뒤꿈치가 부서진 채 발견됐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왕비 신발은 1971년 발굴 당시 양쪽 모두 뒤꿈치가 부서진 채 발견됐다.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 발굴 당시만 해도 국내엔 제대로 훈련받은 문화재 보존과학자가 없었다. 당시 정부의 긴급 호출을 받아 김유선 박사(원자력연구소)를 반장으로 한 보존과학반이 꾸려졌지만 자연과학자 중심의  응급 보존처리엔 한계가 있었다. 일부 금속품의 녹 처리가 잘못돼 원형이 훼손되거나 추가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사라지기도 했다. 1973년 처음 나온 무령왕릉 보고서는 “조속히 연구실험기기, 시설, 숙련기술자들이 마련돼 장기적인 계획 밑에 모든 문화재가 다루어질 여건이 조성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는 경주 천마총(1973)·황남대총(1974) 발굴과 맞물려 미룰 수 없는 당면 과제가 됐다. 76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과학실이 마련되면서 무령왕릉 관련 과학연구에서 앞서가던 일본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특히 적외선 조사 등을 통해 91년 무령왕릉 출토 목관의 수종이 일본에 자생하는 금송(金松)이란 사실을 확인(경북대 박상진 교수)한 것은 우리 보존과학의 대표 성과로 꼽힌다.

발굴 당시 바닥 잔존물에 섞여 수거됐던 금동신발 파편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발굴 당시 바닥 잔존물에 섞여 수거됐던 금동신발 파편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1990년대 중반부터 유기물 분석도 활발해졌다. 바닥 잔존물 속 물고기 뼈를 분석한 결과 은어로 밝혀졌는데(서울대 이준정 교수팀) 당시 제상에 올린 거로 추정됐다. 동물·식물·지질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융복합 성과다.”(국립중앙박물관 유혜선 보존과학부장)

1985년 합성수지를 이용해 뒤꿈치를 임시 복원한 왕비 신발 모습. 이후 수장고의 잔존물에서 파편들을 확인해 현재 모습으로 끼워 맞췄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1985년 합성수지를 이용해 뒤꿈치를 임시 복원한 왕비 신발 모습. 이후 수장고의 잔존물에서 파편들을 확인해 현재 모습으로 끼워 맞췄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최근엔 컴퓨터단층촬영기(CT), 나노 CT 등 첨단 장비에 힘입어 무령왕과 왕비의 베개 및 발 받침의 연륜 연대 측정이 시도되고 있다. 연륜 연대란 나무의 나이테가 일 년에 하나씩 증가하는 것에 착안해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인데 나이테 두께나 조직의 치밀함은 나무가 자라는 지역의 기후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주박물관 곽홍인 학예연구사는 “수종과 기후 분석을 통해 문물 교류의 흐름을 추정할 수 있다”면서 “범죄 사실을 과학수사로 밝혀내듯 보존과학을 통해 그간 문헌 연구 성과를 뒷받침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유물 복원 역시 꾸준히 진행 중이다. 발견 당시 무너지고 부서져 있던 왕과 왕비의 관재는 못 위치까지 확인해 2017년 관 형태로 첫 전시 됐다. 올해 50주년 특별전에선 재현품도 등장한다. 공주박물관 윤지연 학예연구사는 “옻칠을 몇 번 했느냐까지 CT로 밝혀낼 수 있었다”면서 “최대한 당대의 화려했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재현품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권오영 교수는 “동남아산 구슬 등 새롭게 분석된 유물을 통해 동아시아 교류사의 공백이 메워지는 중”이라며 “반성과 회한을 넘어 새로운 반세기를 열어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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