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신 마루타 된 기분" 눈치 보는 의료진, 퇴사까지 고민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백신 안 맞는다고? 대단하다. 마스크 꼭 잘 쓰고 다녀라"

대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조무사 신모(35)씨의 귀에 최근 자주 들려오는 말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대상자인 신씨가 병원에 거부 의사를 밝힌 뒤 벌어진 일이다. 임신을 준비 중인 그는 부작용이 있을까 우려돼 어려운 결심을 했다. 신씨는 "임상시험 사례가 적다 보니 어느 곳에서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라며 "나이 때문에 임신 준비가 급한데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신씨가 다니는 병원은 다음 달 초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할 예정이다. 그는 병원 내에서 “접종을 안 한다는 이유로 피해를 주는 것처럼 바라보고, '마스크를 잘 끼고 다니라'고 핀잔을 주거나 '백신을 안 맞는다니 대단하다'며 뒤에서 수군거린다"며 "신경이 쓰이고 불안해서 임신이 되겠나 싶어 퇴사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 26일 오전 충남 홍성보건소에서 의료진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접종을 준비하고 있다. 뉴스1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 26일 오전 충남 홍성보건소에서 의료진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접종을 준비하고 있다. 뉴스1

백신 접종 대상자들의 ‘말 못 할 고민’

백신 접종 대상이 된 일부 의료진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알레르기 반응이나 임신 등 개인 사정으로 접종을 피하고 싶은 경우 죄를 짓는 듯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주변의 ‘눈총’이 싫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접종을 받았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지난 26일 전국 17개 시도 보건소와 213개 요양시설 등에서 입소자와 종사자 1만8489명이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 27일부터는 병원 및 코로나19 생활치료센터의 의료진·종사자에게 화이자 백신이 접종되고 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지난 22일 정례브리핑에서 “백신 접종을 의무화할 계획이 없고, 접종을 받지 않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전파를 하더라도 구상권을 청구할 계획이 현재로써는 없다”고 밝혔다. 방역 당국도 접종 거부 현상을 어느 정도 예견했지만, 현장 분위기는 사뭇 심각하다는 게 당사자들의 호소다.

지난 26일 오전 서울 금천구 보건소에서 의료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한 요양보호사에게 접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지난 26일 오전 서울 금천구 보건소에서 의료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한 요양보호사에게 접종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익명을 요청한 한 대학병원의 호흡기내과 A교수는 "코로나19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은 피해를 줄까 봐 백신을 거의 다 맞는 분위기지만, 자발적이라기보단 강압적인 분위기"라며 "터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예방률이 높은 화이자 백신을 맞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고 아스트라제네카를 맞는 것에 대한 불만이 일부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온라인 간호조무사 카페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경기도 양평의 한 요양병원에서 근무한다는 B씨는 “반의무적으로 다음 달 2일부터 백신을 맞는다"며 "맞지 않으면 눈치를 봐야 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마루타 되는 기분 별로다. 지인들도 내가 맞은 뒤 괜찮은지 보고 맞겠다고 한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도 없는 건가?”라는 글도 올라왔다.

취업 준비생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접종을 결정했다고 한다. 한 간호조무사 준비생은 “병원에서 본인의 선택이라고 했지만, 백신을 안 맞으면 취업을 못 할 것 같아 그냥 맞으려고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실습생도 “병원에서 백신 안 맞으면 실습 못 한다고 배짱을 부리더라”라고 전했다.

코로나19 환자 치료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화이자 백신 접종이 시작된 27일 오전 서울시 중구 국립중앙읭료원 중앙예방접종센터 접종실에서 화이자 백신이 상온에 해동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기자협회]

코로나19 환자 치료 의료진을 대상으로 한 화이자 백신 접종이 시작된 27일 오전 서울시 중구 국립중앙읭료원 중앙예방접종센터 접종실에서 화이자 백신이 상온에 해동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기자협회]

사명감 필요 vs 사회적 낙인찍기

'백신 접종 의무화' 분위기를 두고 의료계의 반응도 엇갈린다. “의료진이니까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주장과 “우리도 거부할 의사가 있다. 부작용은 누가 책임져 주나”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의료진으로서 사명 의식을 갖고 백신을 맞는 것은 필요한 부분이지만, 강제적으로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의료진도 한 명의 개인으로서 선택권을 가지므로 백신 접종을 거부할 수 있다”며 “특별한 이유 없이 접종을 거부하는 건 사회적 의무에 반하지만, 임신 등 개인적 사정에 따라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이어 “생명권 측면에서 볼 때 환자들은 의료진에게 안전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면서도 “개인의 사정과 상관없이 의료 분야에 종사한다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건 사회적 낙인찍기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함민정 기자 ham.minj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