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성주의 귀농·귀촌 이야기(88)
겨울 철원은 정말 춥다. 특히 올겨울은 제대로 된 추위가 몇 번 왔는데 날씨를 알리는 방송에서 철원의 온도를 듣게 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혹한에 어떻게 사나 싶지만, 겨울이면 늘 가는 곳이다. 겨울마다 철원을 찾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두루미이고, 하나는 파프리카를 키우는 청년 농부 때문이다.
이번 겨울은 여러 가지 악재로 두루미 탐조를 하지 못하였다. 저 멀리 북녘에서 찾아온 두루미를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조류독감, 코로나19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괜한 민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말이다.
대신 민통선 안의 파프리카 농장을 찾아갔다.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가 최근에 파프리카 농사로 매우 핫하다. 예전에는 오이 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어느 순간 파프리카로 전업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꽤 많은 농가가 대형 비닐 온실을 지어 파프리카 재배를 하고 있다. 파프리카는 경남의 진주, 고성 등지에서 많이 생산됐는데, 지금은 전국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남한의 최북단인 철원도 주요 생산지다.
평소에 파프리카를 접하지만 정작 파프리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다. 파프리카는 단맛과 매운맛이 나는 야채다. 고추와 비슷한 맛이 나는데, 가짓과라고 하니 다른 종인 것 같다. 고추를 개량한 피망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농가에서는 말하지만 정작 외국에서는 피망과 파프리카를 비슷하다고 퉁치고, 우리도 둘을 그냥 단고추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이고 유럽의 헝가리에서 많이 생산된다고 하는데,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건너온 듯하다. 우리나라 파프리카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철원에서는 파프리카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내수용인 오이는 경쟁이 심하지만, 수출품인 파프리카는 농장의 매출을 한껏 올려주니 말이다. 작년과 재작년에 일본과 수출 마찰로 파프리카도 영향을 받을까 싶었는데, 막상 일본도 자국산 파프리카로는 물량을 맞추지 못해 수입을 늘리는 가운데 한국산이 매우 인기란다. 코로나19 때문에 네덜란드산 수입에 차질이 생겨 한국산을 더 찾고 단가도 더 쳐주고 있다니 말 그대로 효자다.
철원의 파프리카 재배는 젊은 농부들이 주도하고 있다. 철원에서 도시로 갔다가 귀농한 젊은이들이 파프리카 농사를 이어받아 재배하고 있다. 몇 년 사이 기술적 발전이 생겨 품질이 좋아지고 수확이 늘고 있다고 한다. 농가마다 연 매출이 수억 원대에 달하고 있다. 게다가 파프리카 농업 법인을 만들어 노하우를 공유하고 공동 마케팅을 추진하고 있으니 몇 년 후에는 철원이 한국의 파프리카 중심지가 될 듯하다.
다른 지역도 파프리카를 하고 있는데 너무 철원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겠지만, 철원을 높이 사는 것은 젊은 농부들이 파프리카를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청년이 멀리하는 농업을 강원도 최북단에서 시작하고 성과를 내는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럽다.
근남면 마현리라는 곳은 민통선 안에 있는 마을이다. 출입하려면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를 늘 지나가야 한다. 여기 왜 왔냐고 하는 군인에게 사유를 이야기하고 신분증을 내밀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지역이다. 마을은 70년대에 조성된 새마을 주택이 바둑판처럼 놓여 있다. 보건소와 우체국이 있고 폐교됐지만, 초등학교 건물도 있는 것을 보면 예전에는 인구수가 꽤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썰렁한 마을이다. 그런데 이 마을을 지나면 청년과 아이들이 꽤 보인다. 도시로 갔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온 덕분이다.
도시에서 학교를 나오고 직장을 다니던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각자마다 사연이 있었겠으나 지금은 농업만으로도 충분히 미래를 꾸려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파프리카 농사법을 제대로 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기술을 쌓아가고 있다. 농장마다 파프리카 종자와 농법이 다른 것은 자신의 농장 컨디션에 맞추어 종자를 선택하고 농법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있다. 내수와 수출 거래처를 각자가 확보해 유통하고, 때로는 서로 협동해 출하하기도 한다. 지역의 4H회에 가입해 교류하고 소통을 하고 있다. 상당수가 귀농하였으니 협동이 필요함을 느꼈으리라 여겨진다.
전국적으로 청년 농을 육성하기 위해 해마다 신청자를 모집해 뽑고 매월 80만원 이상의 지원금을 주고 있다. 부모의 농업을 이어받는 후계 농이 많다. 그래서 부모에게 물려받는 토지와 자산에 따라 스타트 라인이 다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만나본 청년 농 대부분은 느슨하지 않았다. 열정이 대단했다. 도시에서 살아 본 경험이나 젊은 소비자의 감성을 가지고 작물을 재배한다. 기존의 관행 농법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방안을 찾아본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재배도 그중 하나다.
다만 아직은 젊은지라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잘 모르고 무뚝뚝해 보이고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선입견일 뿐이다. 아부할 줄 모르는 순수함으로 보고 싶다.
파프리카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한 청년 농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된다. 그저 수확량만 많고 보기만 좋으면 최고인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먹어보고 느껴보고 평가를 하고 공유하는 세상이다. 내가 키운 파프리카를 누군가는 맛있게 먹을 텐데, 맛있게 먹는 방법을 만들어 제시한다면 그것이 최고 아닌가. 그곳에서 들은 몇몇 레시피는 탐이 날 정도였다.
지금은 파프리카를 심을 시기라 현지에서 살 수 없다. 5월 정도 되면 제대로 된 파프리카를 만날 수 있다. 그냥 고추장에 찍어 먹는 샐러드로, 볶아 먹는 채소로만 파프리카를 만나지 말고 파프리카 농장에 가볼 것을 추천한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매어진 하얀 줄에 덩굴로 타고 올라가는 노랑, 초록, 빨강 파프리카를 보면 눈이 다 시원해진다. 높은 천정까지 촘촘히 매어진 줄을 보면 마치 설치미술 작품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파프리카 청년 농에게서 우리 농업의 풋풋한 미래가 보였다. 아직 우리는 희망이 있다.
슬로우 빌리지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