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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나면 머리카락·눈썹 뽑아, 부모가 아이 감정 알아줘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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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호 26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모발뽑기 장애 

아이마음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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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예약 안 되신 환자분이 선생님께 잠깐 인사만 드리고 가겠다고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간호사가 물었다. 시계를 보니 외래진료 시작까지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환자분 이름이 어찌 되죠?” 내가 물었다. “이승완님이라고 하시네요. 근데 군인인데요?” “아, 승완이…”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승완이는 고2 겨울방학에 치료를 종결했던 환자다. 대학에 입학하고 1년 후 군에 입대했고 첫 휴가를 나왔다가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인사하고 싶다며 병원을 찾은 것이다.

“학원 가기 싫어요”에 할머니 버럭 #속마음 말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시간 갈수록 TV 볼 때도 뽑아 #엄마 1년간 휴직해 아이와 생활 #아빠는 주말마다 자전거 함께 타 #습관반전기법도 치료에 효과적

승완이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부모와 함께 내 외래를 방문했다. 모발과 눈썹의 탈모 증세를 보여 피부과를 찾았고 그곳에서 소아정신과 진료를 권유했던 것이다. 승완이는 첫 내원 당시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승완아 모자를 좀 벗어줄 수 있어?” 내가 말했다. 승완이는 조금 머뭇거리다 예상했다는 듯 무심히 모자를 휙 벗었다. 앞머리와 정수리 부분에 약 3cm 지름 크기로 두피가 희끗희끗 드러난 모습이었다. 피부과 진료 기록을 보았다. ‘환자 스스로 모발을 반복적으로 잡아당겨 뽑는다 함. 일관되지 않고 다양하게 끊긴 머리카락 관찰. 눈썹 결손 동반. 모발 결손 양상은 원형탈모의 전형적 형태가 아님. 소아정신과에 의뢰함’이라고 쓰여 있었다.

강박관련장애, 성인 여자가 남자의 10배

승완이는 ‘모발뽑기장애 (Trichotillo-mania)’로 진단받았다. ‘모발뽑기장애’란 스스로 반복적으로 머리카락을 뽑아내 상당 수준으로 모발의 결손이 발생하는 병이다. 영문명 ‘Trichotillomania’는 그리스어로 hair(모발)를 뜻하는 thrix와, pulling(뽑기)을 의미하는 tíllein 그리고 madness(장애)를 뜻하는 mania, 이 세 단어가 조합되어 탄생한 용어이다. 국문으로는 그동안 ‘발모광’이라 불렸으나 최근 번역을 순화하여 모발뽑기장애라고 부른다. 성인의 경우 여자가 남자보다 10배 많지만 소아청소년기의 남녀비율은 동일하다. 아동에서는 1000명당 2~3명 정도로 매우 드문 병이다. 필자가 지난 20년간 진료한 소아정신과 환자들 중 전형적 모발뽑기장애 증상을 보인 사례가 10건도 채 되지 않는다.

모발뽑기장애는 과거에는 ‘충동조절장애’ 부분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개정된 DSM-5(정신장애진단 및 통계편람-5)에서는 ‘강박관련장애’로 재분류되었다. 강박관련장애에 속한 장애들이 증상과 원인이 유사하고, 가족유전성과 기질적 특성, 약물치료 반응들을 공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인지의 왜곡이 두드러진 요소를 차지하는 강박장애, 신체이행장애, 저장장애가 있는 반면, 신체에 집중된 반복행동을 보이는 모발뽑기장애, 손톱뜯기, 입술씹기 등이 해당된다. 모발을 뽑는 환자들의 다수에서 손톱을 뜯고 입술을 씹는 행동을 함께 나타낸다. 환자들은 이런 반복행동을 은밀하게 행하고 다른 사람이 있을 경우 행동을 억제하여 숨기려 한다. 승완이 부모가 아이의 문제를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된 것도 승완이가 방안에서 혼자 있을 때만 모발 뽑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승완아, 머리카락 뽑는 것을 멈춰 보려고 노력해 봤니?” 나는 아이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승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도 잘 안됐어?” “네….”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구나. 어려운 게 맞아. 선생님이 어떤 부분을 도와주면 좋겠어?” “머리카락 뽑는 거 그만하게 해 주면 좋겠고…” “그리고 또?” “화가 안 났으면 좋겠어요.” “아, 승완이가 화날 때가 많은가 보구나. 어떨 때 화가 나는데?” “….” 승완이는 옆자리의 엄마를 곁눈질로 힐끗 쳐다봤다. 나는 부모님을 내보낸 후 승완이와 단독 면담을 시작했다.

아이마음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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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이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약간 예민하고 걱정이 많은 성향 이외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엄마가 직장 일로 갑자기 바빠지면서 승완이는 주로 할머니가 도맡아 돌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면서 다니는 학원 수가 많아지자 학원 숙제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하루는 승완이가 학원을 가기 싫다고 했는데 이 말에 할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잠을 재우지 않고 학원 숙제를 시킨 적이 있었다. 승완이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이해해 주지 않는 할머니가 미웠고 자신을 할머니에게만 맡기는 부모에게 서운했고 화가 났다. 그런데도 학원 가기 싫다는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고 한다.

부모는 이런 사실을 그 당시 잘 몰랐다. 승완이는 숙제가 많은 날 특히 화가 많이 났고, 공부하면서 정수리 머리카락을 뽑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머리카락을 보면서 화가 풀리는 느낌도 받았다. 정수리로부터 시작한 행동이 점차 앞머리 쪽으로 번졌고 눈썹까지 뽑았다. 처음에는 화날 때만 뽑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TV를 보거나 지루할 때도 자동으로 뽑는 행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분노 감정을 달래고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모발뽑기 행동이 자신에게 시원한 느낌과 안도감을 가져다주면서 강화되고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승완이 부모에게 병의 치료 방법을 말하기 전에 왜 이런 행동이 생겼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승완이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나쁜 기분을 남에게 털어놓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입니다. 공부 스트레스, 할머니와의 갈등을 부모님께 털어놓으면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지니고 있구요. 승완이가 자신의 스트레스를 말로 표현하고 수용될 수 있도록 부모님이 기회를 주셔야 해요. 아이가 화를 참기만 하니 내면의 분노가 모발 뽑는 행동으로 표출되었고 점차 반복되면서 지금은 지루할 때조차 뽑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나는 가정환경 내에서의 부모의 태도 변화가 가장 우선이 돼야 함을 강조했다. “승완이가 자신의 스트레스나 분노 감정을 주저 없이 부모에게 말하게 하려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표현들에 대해 경청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도움이 돼요. 일시적으로 아이가 과한 감정표현이나 퇴행적 행동을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과정은 아이가 호전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도기입니다”라고 설명했다.

뽑고 싶을 땐 반대쪽 손목 밴드 만지게

이후 부모는 열심히 노력해 상당한 변화를 보였지만 할머니의 변화는 더뎠다. 할머니는 여전히 아이의 사소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에게 아이의 학습과 훈육에 주도권을 가지라고 권했다. 승완이 엄마는 1년간 휴직을 하고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솔직한 감정표현이 점차 많아지면서 머리카락에 손을 대는 행동이 줄기 시작했다. 아빠도 주말마다 아이와 자전거를 타며 시간을 보냈다.

점차 할머니의 아이에 대한 개입은 줄어갔다. 부모와 가족의 변화와 함께 아이에게는 인지행동치료 모델에 기반한 습관반전기법을 시행했다. 모발을 뽑기 직전의 충동(간질거림, 답답함 등)을 인식하는 훈련이 먼저 실행됐다. 아이가 그 충동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면 충동이 드는 순간 손이 머리로 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다른 행동으로 대치하게 만든다.

승완이는 왼쪽 손으로 모발을 주로 뽑았기에 반대편 손목에 감촉이 부드러운 밴드를 차게 했다. 모발을 뽑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마다 왼쪽 손가락으로 오른쪽 손목의 밴드를 만지도록 훈련했다. 꽤 효과적이었다. 물론 부모의 태도 변화가 선행되었기에 치료 과정이 순조로웠다. 승완이는 중학교 입학하기 전 증상이 거의 사라졌고 이후로도 방학 때마다 상담했다.

치료를 종결하던 날 대학생이 되면 인사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던 승완이가 정말 인사하러 들른 것이다. 거수경례하는 모습이 무척 늠름했다. 군인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쓰며 나가는 승완이의 뒷모습을 보며 묘하게 벅찬 감정이 올라왔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가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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