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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이재명의 신비로운 기본소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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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본소득에는 마키아벨리 냄새가 난다. 오해 마시라. 욕이 아니다. 유럽의 기본소득 대표 이론가 필리프 판 파레이스가 스스로 표현한 전략이 마키아벨리즘이다. “적은 액수의 기본소득으로, 뒷문을 통해 슬며시 들여와 모두가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자”(『21세기 기본소득』). 이쯤 되면 기본소득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재원 방안 등 아직 ‘뇌피셜’ 수준 #닭이 못 될 병아리엔 사료 아깝다 #구체적 계획 내놓고 검증받아야

이재명 경기지사의 기본소득 전략이 이 노선이다. 닫히는 문에 발을 끼워 넣듯 일단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이 지사는 “단기 목표 연 50만원, 중기 목표 연 100만원, 장기 목표 연 200만~600만원으로 실시하자”고 제안한다. “월 4만원꼴은 기본소득이 아니라 용돈 소득에 불과하다”는 김세연 전 국민의힘 의원의 비판에 이 지사는 ‘병아리도 닭’이라고 응수했다.

기본소득 병아리는 무럭무럭 자라 먹음 직한 삼계탕 재료가 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아직은 ‘신비로운 계획’ 수준이다. ‘뇌피셜’에 가까운 희망과 정치적 조급성으로 버무려져 있는 느낌이다. 이 지사는 말한다. “기본소득과 기존 복지는 병행할 수 있다. 둘 다 해보고 비효율적인 것은 버리면 된다.” 그럴까. 일단 시작된 복지 혜택을 줄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선거철마다 선심성이라는 논박이 오갔지만 결국 현금성 복지의 대상과 금액이 늘어나기만 하지 않았나.

가장 큰 ‘신비’는 재원이다. 중기 목표 연 100만원 기본소득에 드는 예산은 52조원이다. 이 지사는 일반 예산 절감과 조세 감면 축소를 통해 조달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예산 구조는 복지 예산 외에는 대부분 경직성 경상비·인건비이거나 인프라 확충·유지 예산이다. 어떤 예산을 깎을 수 있을까. 공무원이라도 줄이겠다는 걸까. 조세 감면 축소? 대기업과 부자들이 비과세나 조세 감면의 혜택을 독차지한다는 것은 강박적 공정 관념이 빚어낸 착각이다. 한국은 40%의 근로자가 면세자고, 상위 20%의 소득자가 소득 세수의 90%를 담당하는 나라다. 조세 감면의 절대액은 고소득층에서 높지만 소득 대비 감면액 비율은 중·저소득자에게서 훨씬 높다(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정치적 자신감을 어느 정도 얻은 걸까. 이 지사는 금기시되던 증세 필요성을 꺼내긴 했다. 기본소득을 위한 목적세 등을 도입하자는 거다. 그러나 먼 이야기다. 병아리가 ‘중닭’으로 클 때까지 증세는 필요 없다는 주장은 변함없다. 기본소득 도입론자들은 국민의 80~90%는 ‘내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아’ 찬성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적 자원을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올 사회적 갈등은 어떻게 감당할 건가.

이왕 기본소득이 정치 테이블에 오른 이상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다. 국가의 틀을 바꿀 큰 문제다. 언젠가 닥칠지 모를 ‘노동 없는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짚어볼 게 한둘이 아니다. 재원 방안, 복지 영향, 경제 효과 등등. 소득주도 성장처럼 ‘선의로 포장된 지옥 길’이 될 가능성은 없는지도 따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막연한 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안을 내놓고 검증받아야 한다. ‘공공의 자원을 전체 구성원에게 돌려주는 일’ ‘공정 가치와 정의에 부합하는 정책’ 같은 가슴 뛰는 정치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 병아리에겐 미안하지만 멀쩡한 닭으로 클 수 없는 병아리에게 사료 값을 들일 수는 없다.

살짝 걱정되는 건 이 지사의 논쟁 방식이다. 이 지사는 월 4만원 지급의 실효성을 묻는 김세연 전 의원에게 “의원님은 (서민의 처지를) 겪어보지 않아 모르시겠지만”이라고 긁었다. 금수저가 흙수저를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는 식이다. 선별복지가 빈부격차 해소에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중산층의 조세 저항을 유발하려는 보수언론의 속셈”이라는 음모론을 들먹였다. 논리와 발화자를 뒤섞는 순간 토론은 끝나고 싸움이 시작된다. 지역화폐의 문제를 지적하는 연구에 ‘얼빠진 국책기관’이라고 윽박질렀던 것처럼.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