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한승주 前 장관이 말하는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

중앙일보

입력 2021.02.26 00:06

문재인 정부, 김정은 환심 얻기 위해 너무 양보한다는 오해 받아

北 원전 건설 문제, 비밀리 추진 말고 공개적으로 토론했어야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에 관해 역설하고 있다.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에 관해 역설하고 있다.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출신인 그는 문민정부 때는 외교부 장관(1993년 2월~1994년 12월)을, 참여정부 때는 주미 대사(2003년 4월~2005년 2월)를 지내며 한국 외교의 선봉에 섰다. 그가 외교부 장관을 맡았던 때는 헌정 사상 첫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였고, 주미 대사로 발탁됐을 때는 헌정 사상 첫 진보 정권이 재창출됐던 때였다.

“코드·정파에서 벗어나 국익 중심에 놓고 토론하라”

이후로도 한 전 장관은 ‘코리아 글로벌 포럼’ 의장(2011년),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2019년 5월~현재) 등을 맡아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을 고민했다. 한 전 장관은 최근에는 [한국에 외교가 있는가]라는 책을 펴내고 ‘바이든 시대 한국 외교의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는 저서에서 “국가 간 외교는 한쪽이 지고 다른 한쪽이 이기는 윈-루즈(win-lose)보다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win-win)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 좋은 관계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월간중앙이 한 전 장관과 만나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에 관해 물었다. 인터뷰는 2월 3일 오전 그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 접견실에서 진행됐다.

“실용적 외교는 합리적 판단·결정에 의한 외교”

2017년 6월 1일 제12회 제주포럼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서정하 제주평화연구원장, 공로명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전 몽골 대통령, 아니발 카바쿠 실바 전 포르투갈 대통령, 원희룡 제주지사,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이홍구 전 국무총리,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 임성남 외교부 1차관.

2017년 6월 1일 제12회 제주포럼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서정하 제주평화연구원장, 공로명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전 몽골 대통령, 아니발 카바쿠 실바 전 포르투갈 대통령, 원희룡 제주지사,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이홍구 전 국무총리,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 임성남 외교부 1차관.

[한국에 외교가 있는가]는 어떤 책인가?
“그 어느 때보다 유능한 외교가 절실한 격동의 시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외교는 인재·절차·정책 부재의 ‘3무 외교’로 비판받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 외교와 닮은꼴이다. 북한의 핵무장 기정사실화와 도발 위협 증가, 동북아의 국제 질서 재편, 미·중의 알력으로 인한 신냉전…. 대한민국 외교에 미래가 있을까.”
외교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나 국가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 인간 간의 관계다. 따라서 외교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공통점이 많다. 외교에는 목적에 맞는 수단과 전략이 있어야 할 것이며, 예의범절도 필요할 것이다. 외교라는 게임에서는 통념과는 달리 상호 간의 신뢰와 신의도 많은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실용적 외교란 무엇인가?
“실용적 외교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외교가 아니라, 목적에 맞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외교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념적 선입견 또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판단과 결정으로 운영되는 외교를 뜻한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트럼프 행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트럼프가 충동과 본능, 그리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사안을 결정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대북 관계를 반공사상에 의해 결정하고 대일 관계를 반일 감정으로 결정한다면 실용적 외교가 될 수 없다.”
최근 발간한 저서에서 “민주국가에서는 외교의 50%가 국내 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외교가 대중영합주의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어떤 의미인가?
“한국은 수 세기 동안 주변 강대국에 지배되거나 찬탈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 국민과 정치인들을 어느 정도 사대주의에 물들게 함과 동시에 피해의식을 갖게 했다. 아울러 강대국에 대한 저항의식을 심어준 측면도 있다. 따라서 한·일 관계, 한·중 관계, 한·미 관계 등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갖게 해준 면이 있다. 내가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한 2006년 10월, 북한은 제1차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내가 만난 대부분의 북한 정부 안팎의 인민은 ‘이제는 북한을 겁주던 중국 같은 주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며 으쓱해하더라. 그때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외국에 대한 적대심을 갖고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다.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국내 정치가 외교(친미)의 제약이 되고, 반일의 동기가 되며 대일 강경 정책의 요인이 되기에 십상이다.”
김영삼 정부 때 외교부 장관, 노무현 정부 때 주미 대사를 지내셨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김영삼 정부 때는 제1차 북핵 위기에 매달려 있을 때였다. 그때 마침 한국에 우호적인, 외유내강 스타일의 첸치천(錢其琛)이 중국 외교부장이었다. 첸치천에게 유엔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해 많은 협조를 받았고 북한의 도발 정책을 방지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미면 어때?’라는 유명한 발언을 한 다음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한·미 관계 개선과 우호 관계 유지에 주력했다. 미국인들은 그의 발언은 불편하지만 행동(이라크에 파병,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교섭 개시 등)은 우호적이라고 평가했다.”

한 전 장관은 저서 [한국에 외교가 있는가]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시 이라크 파병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일 노 대통령이 아니라 보수 진영 출신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면 정치권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의 운동가들이 분명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하며 강력하게 반대할 사람들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층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누구보다 유리한 입장이라 하겠다. 나는 주미 대사 시절 바로 그 점을 미국 쪽에 알려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 대통령의 언사(words)가 과격하기 때문에 바로 이렇게 좋은 행동(deeds)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설득했고, 미국 쪽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납득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 외교, 노무현 정부 때와 달라”

1993년 7월 당시 한승주 외무부 장관(왼쪽)이 한국을 방문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 사진:한승주

1993년 7월 당시 한승주 외무부 장관(왼쪽)이 한국을 방문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 사진:한승주

문재인 정부의 주요국 상대 외교를 평가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 미국과의 협조를 마다치 않았다면, 문 대통령은 남북 간 우호 수립을 위해 미국과의 협력을 강조한 면이 있다. 결국은 한국의 주선으로 트럼프-김정은 간의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는 한국이 북한과의 친선을 위해 과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줬고, 국내적으로는 김정은의 환심을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이 양보한다는 오해를 받게 된 점도 있다. 중국의 경우도 북한과의 친화에 대한 협조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문 대통령의 우선순위는 종전 선언과 전시작전권 전환, 그리고 한·미 군사훈련 중단 혹은 축소다. 북한과 화친하기 위해서다. 이런 구체적인 목표가 문 대통령에겐 있다. 노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내가) 주미 대사로 있던 2년 동안 노 대통령의 최대 목적은 미국에 잘 협조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제재나 무력 위협을 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저서에서 “문재인 정부도 트럼프 정부처럼 3무(無) 외교였다”고 비판했다.
“효과적인 외교를 위해서는 능력과 경험 있는 인재들이 있어야 하고 정책 입안을 위해 정부 내에 조직된 절차가 운영돼야 하며 정책의 목표와 방법이 합리적으로 수립돼야 한다. 외교 조치가 뜻대로 되지 않아 코스를 바꿔야 할 때도 적절한 출구전략(exit strategy)이 있어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토니 블링컨은 트럼프 정권 시 미국 외교에 이러한 세 가지 요인이 결핍됐다고 비판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3무(無) 외교의 문제점이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다만 문재인 정부에서는 ‘코드’라는 것이 있어서 북한과의 협력 관계를 수립했다. 북한과 미국 간의 화해 추구가 우선적인 정책적 목표가 돼 있었다는 것이다.”
트럼프 시대 대북 정책을 어떻게 봤나?
“트럼프는 북핵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정치적인 트럼피즘(한건주의)에 급급하다 보니 한국의 낙관론에 몰입했고, 김정은에 따라(끌려)다녔다고 본다. 트럼프의 북한 문제 해결사라는 타이틀을 위한 ‘한건주의’가 결국은 실패의 길을 걸었는데, 북핵 문제 해결이나 한반도 안보에 역효과를 내는 결과를 낳았다.”
바이든 시대 미국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전망하는가?
“바이든은 상원 외교위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는데 그때마다 북핵을 포함한 북핵 문제에 접근하고 심사숙고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상대(공화당이 다수당일 때는 리처드 루가 위원장)보다는 온건파에 속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민주당이 다수당일 때 외교위원장을 맡아 현실적이고 원칙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또 그의 보좌진은 경험이 많을 뿐 아니라 지한파이며 현실적 외교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지금 그들이 미국의 대한 외교를 주관하고 있다. 그들은 트럼프처럼 경솔하거나 충동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고 한반도 문제에 균형되고 신빙성 있는 정책을 추구할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중용된 토니 블링컨(국무장관)-웬디 셔먼(국무부장관)-제이크 설리반(국가안보보좌관) 라인업을 어떻게 평가하나?
“그들은 외교 문제 전반은 물론 한반도 문제에도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준비된 전문가들이라고 생각한다. 바이든에게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대신 들어야 하는 말을 해줄 것이며 내부적인 협의 절차가 이미 구성돼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트럼프가 어지럽혀놓은 미국의 외교 정책을 다시 정리하고 수립하며 외국 특히 동맹국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미·중 갈등 계속하지만 전쟁까지 가지는 않을 것”

2010년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자문단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자문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한승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 대통령, 현홍주 전 주미 대사.

2010년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자문단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자문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한승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 대통령, 현홍주 전 주미 대사.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키 플레이어로 꼽힌다. 바이든 행정부와 호흡을 잘 맞출 것으로 생각하는가?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들의 북한에 대한 지식·인식·판단이 있으므로 트럼프처럼 한국의 무조건적인 낙관론에 따라가지는 않겠지만, 한국 측에서 합리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대북 정책에 현실적인 입장과 접근을 보여준다면 프로와 프로 간에 합리적인 대화와 협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시절, 청와대가 외교를 주도하는 인상이 짙었는데.
“그러한 인상을 준 것은 실상이 그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대북 관계를 포함해서 외교를 누가 어떻게 주도하느냐 하는 것은 집권자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대북 정책, 대미 관계, 대일 관계, 대중 관계 등 주요 외교 현안들이 청와대에 의해 주도되는 인상을 준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북한의 비핵화는 가능할까?
“궁극적으로는 가능할 것으로 본다. 다만 ‘언제·어떻게’가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이나 비핵화의 필요성이 매우 해이해진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정책적 연구와 긴밀한, 특히 한·미 간에 협의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내 생전에는 해결될 거라 말했는데 지금은 그 자신이 없어졌다(웃음).”
바이든 시대 미·중 갈등을 어떻게 전망하나?
“경쟁과 갈등은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상호 의존성, 국제적 다원성, 각국(미국과 중국)의 자신의 이익(Self Interest)을 위해 갈등을 자제하고 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전쟁까지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바이든 시대 우리나라 외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조금 직설적으로 말해서 노무현 정부의 최대 외교(대미) 목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우선적인 목표는 북한과 협력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한다는 비판을 국내외에서 받고 있다. ‘우리가 운전석에 앉았다’는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북한의 관계 개선을 주선해 북핵 해결은 미국에 맡기고 우리는 남북관계 개선에 집중하는 정책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종전 선언, 전시작전권 조기 이양에 집중했으며 북핵 문제 해결, 한·미 군사 합동훈련 등 안보 태세 강화에는 소홀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균형 있는 정책을 취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등거리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은 동맹국으로서,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서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일 관계는 양국만의 관계뿐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3개국 관계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외교 현안임을 인식해야 한다. 북핵 문제, 군사 정보 협력, 아시아 주둔 미군 문제와 관련해 한·일 간의 우호·협력은 한국의 안보, 한·미 동맹의 건재에 극히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이 군대를 주둔하는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다.”
문재인 정부 들어 대일 관계가 경색됐다. 원인과 해법은 무엇일까?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김대중 정부는 예외)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으나 임기 후반에는 종군위안부, 독도 문제 등으로 관계가 경색되곤 했다. 그에 비해 문재인 정부는 집권하면서부터 일본에 대해 냉각된 태도로 시작했다. 2007년 어렵게 이뤄진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고, 미쓰비시·신일철주금 등 한국 강제 노역자 배상 문제에 ‘사법농단’을 이유로 들어 온건한 대응을 범죄시했다. 전임 정부들과 비교하면 대일 관계 경색 완화의 의지가 약한 것으로 보였다.”

“미국의 적극 참여 없는 남북 정상회담은 희박”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이 최근 펴낸 [한국에 외교가 있는가]의 표지.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이 최근 펴낸 [한국에 외교가 있는가]의 표지.

최근 들어 문재인 정부는 대일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기미가 엿보인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집권 말기에 대일 관계 개선이라는 업적(legacy)을 남기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쿄올림픽 전후로 남북,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 추진이 가능할 거란 전망도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현재로서는 도쿄올림픽이 열릴 것이라는 전망도 확실치 않다. 다만 열리더라도 일본이 미국에 밀착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적극적 참여나 격려 없이 북한과의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본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중하고 실질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진보·보수 등 정권 성향을 떠나 우리의 대일 외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다고 보나?
“진영주의(tribalism)를 떠나 무엇이 우리나라 국익(안보·경제·외교 등)에 가장 유리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고 냉철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주변국의 예를 볼 때 일본과 호주는 미국에 밀착하고, 싱가포르는 미국에 경사(傾斜)하면서 중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필리핀은 지도자의 편협성으로 인해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하다. 반면 한국은 확실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유럽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예를 들면 모든 회원국이 친미적인 것은 아니나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과 동맹은 유지하고 있다. 우리도 그들의 외교 행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교훈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가 4강 가운데 러시아를 소홀히 한다는 지적도 있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중 하나이고 한반도에 커다란 경제적·안보적 이해관계와 역할을 갖는 나라다. 더욱이 요즘은 북한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중국과 대미 연합체제(entente)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대러 외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관계 설정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2020년 한·러 수교 30주년(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해 2021년 진행), 2022년 한·중 수교 30주년이다. 러시아·중국과의 수교는 우리 외교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내가 장관직을 맡은 1993년 1차 북핵 위기가 터졌는데 중·러와 수교가 돼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에 대해 연합전선을 만들어가고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러·중 간에 알력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두 나라는 큰 접경지대를 갖고 있고, 경제적으로 BRI(일대일로)에 있어서도 경쟁 관계에 있다. 역사적으로 북한은 중·러 갈등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해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러시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일·중과 공유할 수 있는 이익 찾아야”

2003년 4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승주 주미 대사에게 신임장을 준 뒤 악수하고 있다.

2003년 4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승주 주미 대사에게 신임장을 준 뒤 악수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판문점 정상회담 관련 ‘USB 사건’을 어떻게 보나?
“2018년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이동식저장장치(USB 메모리)를 줬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와 북한·미국과의 관계를 동급으로 취급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2018년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었던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2월 2일 기자들과 만나 “미국에도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넸던) USB 메모리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정 후보자는 2018년 3월 대북특사와 대미특사 자격으로 평양과 워싱턴DC를 방문하면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주선했다.

한국 외교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면 무엇부터 바꿔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코드나 정파가 아니라 국익을 중심에 놓고 토론해야 한다는 데 있다. 또 우리끼리 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하고도 해야 한다. 공유할 수 있는 이익을 찾기 위해서다. 필요하다면 중국하고도 해야 한다.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주요국에 특사를 보내지 않나. 그런데 우리는 마치 전리품 나눠주듯이 특사로 갈 사람을 정한다. 메시지보다도 정치인 자신의 홍보에 신경 쓰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선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그쪽의 책임자들과 북한 문제에 대해 전략 대화를 하기도 하지만, 참 드물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현실에서 재량을 발휘하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외교를 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어떤 제안이 있더라도 그것에 대한 합의를 얻는 게 불가능한 게 문제다. 지금 상태에선 일반적인, 원칙적인 입장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국민과 지도자 모두 자신감을 좀 더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의견이 갈라지는 건 불가피하지만,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책 마비를 막는다. 정부가 북한 원전 건설 방안을 검토했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비밀리에 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어떻게 전기 문제를 도와줄 수 있을까 내놓고 토론했다면, 지금처럼 의혹이 불거지고 국론이 분열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글 최경호·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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