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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무단수정 교육부 직원, 징역 판결에 뒤늦게 징계위 재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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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법원. 중앙포토

대전지방법원. 중앙포토

지난 정부 시절 만든 교과서의 '대한민국 수립' 문구를 정권이 바뀐 뒤 '정부 수립'으로 무단 수정한 교육부 공무원에게 법원이 징역형을 선고했다. 공무원에 대한 징계를 의결하는 중앙징계위원회는 2019년부터 해당 공무원에 대한 징계를 미뤄오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절차를 재개하기로 했다.

대전지법은 25일 교육부 전 교과서정책과장 A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사문서위조 교사·위조사문서행사 교사 혐의가 모두 인정됐다.

정권 입맛대로 수정된 교과서…지시한 과장 ‘징역 8개월’

A씨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집필된 초등학교 6학년 사회교과서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2017년 9월에 213곳에 걸쳐 수정한 혐의를 받았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수립’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유신체제’는 ‘유신독재’로 바뀌었고 북한에 대한 부정적 서술과 새마을 운동 관련 문장이 삭제됐다.

‘대한민국 수립’이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냐는 2016년 국정 역사교과서 논란 당시 예민한 주제였다. 2016년 당시 교육부는“‘대한민국 수립’은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국가가 완성되었음을 표현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당시 집필 책임자였던 박용조 진주교대 교수는 A씨의 요구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고칠 순 없다”며 수정을 거부했다. 하지만 A씨는 박 교수를 빼고 수정한 뒤, 박 교수도 협의 과정에 참여한 것처럼 박 교수의 도장까지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서 관련 이미지. 중앙포토

교과서 관련 이미지. 중앙포토

검찰 기소 뒤에도 해외근무…교육부는 징계절차 미뤄

A씨는 이듬해인 2018년 2월부터 태국 한국교육원장으로 근무했다. 교과서 무단 수정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건 A씨가 출국한 지 한 달여 뒤였다. 박 교수의 문제 제기와 자유한국당의 고발 뒤 검찰 조사가 이어졌다. 같은 해 6월 검찰은 A씨를 기소했지만, A씨는 문제 없이 해외 근무를 마쳤고 지난 1월 귀국해 지금은 지방의 한 국립대에서 일하고 있다.

해외 교육원장은 교육부·교육청 공무원과 일반 교사들이 경쟁하는 자리다. 당시 교육부는 “문제가 된 직원에게 징계가 아닌 특혜를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교육부 관계자는 "당시 징계위에서는 1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징계를 보류하기로 결론냈다"며 "이번 판결문을 받는대로 징계위를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고 이상의 형은 공무원의 당연퇴직 사유인 만큼 중징계(파면·해임·강등 등)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실무자 혼자 했겠나" 꼬리자르기 논란 계속

2019년 6월 국회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의 사회교과서 불법 조작 사태 긴급간담회'에서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왼쪽)가 진주교대 박용조 교구(가운데),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와 교과서를 보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2019년 6월 국회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의 사회교과서 불법 조작 사태 긴급간담회'에서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왼쪽)가 진주교대 박용조 교구(가운데),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와 교과서를 보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교육계 안팎에선 실무자인 과장 혼자 처벌을 받는 것을 두고 ‘꼬리 자르기’란 지적이 나온다. 현 정권의 입맛에 맞춰 교과서를 고쳐 주려는 작업이 교육부 차원에서 이뤄졌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당시 자유한국당은 “이 일을 일선 공무원이 했다고 하면 소도 웃을 일”이라며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도 고발했다. 대전지검은 A씨를 상대로 윗선의 지시가 있었는지를 조사했지만 A씨는 이렇다 할 진술을 하지 않았던 걸로 알려졌다.

교과서 무단 수정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박용조 교수는 25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판결로 정의가 세워져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실질적인 책임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며 “교과서의 대한민국 수립을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바꾸는 건 가장 예민한 문제 중 하나인데, 교육부 직원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현경·전민희·남궁민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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