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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싫다" 비종교적 병역거부…대법 "진정한 양심 땐 정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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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15사단이 지난달 혹한기 훈련을 시행 중인 모습. [연합뉴스]

육군 15사단이 지난달 혹한기 훈련을 시행 중인 모습. [연합뉴스]

대법원 1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25일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인을 거부한다”며 예비군 훈련 등 거부한 혐의(예비군법·병역법 위반)로 기소된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종교가 아닌 비(非)종교적 양심상의 사유로 인한 병역 거부를 대법원이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 "'진정한 양심'이면 종교적 신념 아니어도 인정" #2018년 양심적 병역거부 첫 인정 후 확대…범위 논란

재판부는 “종교적 신념이 아닌 윤리적·도덕적·철학적 신념에 의한 경우라도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해당한다면, 예비군법·병역법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어머니 설득에 군 입대…이후 16차례 예비군 소집 불응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앞서 A씨는 2016년 3월부터 2018년 4월까지 16차례에 걸쳐 예비군 훈련 소집에 응하지 않아 재판을 받게 됐다.

A씨는 1·2심에서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미군이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후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잘못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는 신념이 생겼다”고 밝혔다.

A씨는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으로 군대에는 입대했지만, 군 입대 자체가 양심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고 입대를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 예비군 훈련 소집은 계속 거부했다. 원심은 A씨의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여 예비군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원심은 특히 “A씨가 군 제대 후엔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인의 거부’라는 비종교적 신념에 따라 예비군 훈련에 응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수사·재판으로 인한 형벌의 위험, 안정된 직장을 얻기 어려워 입게되는 피해를 감수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대법원도 이 같은 원심의 판단을 수용한 것이다.

형벌·직장피해 등 감수…"'진정한 양심'따른 병역 거부 정당"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2018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병역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6월)과 대법원 전원합의체 차원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첫 판례(11월)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병무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944명의 양심적 병역 거부 인정 사례 가운데 2명을 제외한 전원이 여호와의 증인 등 종교적 사유로 대체복무가 허용됐다. 이 2명도 병무청 산하 대체역 심사위가 지난 달에야 처음으로 ‘종교적 사유가 아닌 양심상의 이유’로 대체복무를 허용한 경우다.

다만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 거부의 범주를 종교에서 "전쟁 반대""평화주의" 등 개인적 신념과 윤리·도덕적 이유까지 폭넓게 인정하면서, 이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병무청 등에 따르면 현재 A씨 외에도 8명의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대법원이 2018년 양심적 병역거부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진정한 양심’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당시 “진정한 양심이 깊고, 확고하고, 진실할 것”을 전제로 “양심과 관련성 있는 간접 사실 또는 정황 사실이 증명돼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이후 법원은 양심적 병역 거부의 기준을 판례로 구체화해 가는 추세다. 지금까지는 종교적 이유를 들어 집총을 거부한 사례가 압도적이어서 종교 관련 기준들이 판례로 나와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종교적 병역 거부의 경우 해당 종교의 교리, 신도들이 교리에 따라 병역을 실제 거부하고 있는지, 피고인의 정신 신도 여부, 개종한 것이라면 배경, 신앙의 기간, 실제 종교 활동 등을 살펴볼 것을 요구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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