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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남용은 왜 반복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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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사회디렉터

김원배 사회디렉터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환경부가 산하 공공기관 임원의 사퇴 관련 동향을 파악한 문건을 작성했다는 의혹이다. 2018년 말 폭로 이후 공공기관 임원에 대한 사표 강요와 후속 인사에 대한 수사가 이뤄졌다. 1심에선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의 유죄가 인정됐다.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인사농단 #정책 집행은 적법 절차 따라야 #원칙 무시하면 비극 되풀이 돼

1심 판결문엔 문재인 정부에서 이뤄진 공공기관 공모 절차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7개 자리의 임원추천위원회를 구성해 공개 모집 절차를 진행했음에도 환경부 공무원들은 청와대가 내정한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경력이 부족하면 이를 채워줬고, 해당 공공기관에서 질문지를 받아다 내정자에게 줘 면접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겉으론 공모 절차를 밟으면서 실제론 청와대 내정자가 추천되도록 하는 임무는 임추위에 들어가는 환경부 고위공무원의 몫이었다.

“(사전에) 자료를 보내주지 않아 내정자가 탈락하면 혼나거나 좌천될 수 있다.”

“내정자를 통보해주면 임추위를 거쳐서 최종 후보자에 포함해 청와대에 보내줘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굉장히 압박감이 컸다.”

“내정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A가 더 우수하다고 판단했지만 B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줬다.”

“임추위원들이 6~7명인데 단지 점수만 높게 줘서는 안 되며 논의할 때 내정자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후보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판결문에 나온 당시 환경부 공무원들의 진술이다.

그러다 사달이 난 경우도 있다. 지난 2018년 6월 한국환경공단은 상임감사를 공모했는데, 사실 이 자리는 청와대 몫이었다. 이를 알고 임추위에 들어간 환경부 담당 국장이 해당 인사에게 최고점을 줬지만 1차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다.

청와대에서 내정한 인사가 1차에서 떨어졌으니 환경부엔 비상이 걸렸다. 환경부 담당 공무원들은 청와대에 낼 경위서를 3번 쓴다. 신 전 비서관이 “탈락한 내정자를 환경부가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육하원칙에 따라 보고하라”고 했다는 담당자 진술도 나왔다.

서소문포럼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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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청와대와 환경부는 상임감사 자리를 ‘적격자 없음’으로 하고 재공모를 하기로 했다. 이는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기만적 행동이며 인사 농단이나 다름없다. 공모를 믿고 지원한 130여명과 내정자를 몰랐던 임추위원을 들러리로 만들었다. 공모를 한다면 내정자를 두지 말고, 내정자를 임명하려면 공모를 없애는 게 맞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환경부 직원은 전보 인사 대상이 됐다. 반면 탈락한 내정자는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이 합작한 한 회사의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과연 다른 부처 산하 공공기관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법에 따르면 임추위가 후보자를 복수 추천하면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심의·의결한 뒤 대통령이나 주무장관이 임명한다. 판결문엔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담당하는 기획재정부 직원이 환경부 담당자에게 청와대 내정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는 대목도 있다. 수사가 신 전 비서관 윗선으로 진행됐다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논란이 됐을 때 청와대는 이를 ‘체크리스트’라며 부인했다. 이것의 성격을 두고는 논란이 있겠지만 공공기관 인사가 왜곡된 부분에 대해선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했다. 그런 것이 없으니 청와대가 정한 목표에 공무원들이 돌진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됐다.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업무를 담당했던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은 2019년 12월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심야에 사무실에 들어가 자료 삭제를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공무원이 왜 이런 행동까지 했을까. 월성 원전 1호기의 경제성 조작 의혹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불법 출금 의혹도 핵심 관련자의 직권남용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다.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공무원의 행정행위에 대해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는 여당 의원의 주장에 최재형 감사원장은 “동의할 수 없다. 대통령의 공약과 정책 수행은 제대로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책을 수행해도 된다는 주장은 아니죠”라고 반문했다. 감사원장이 기본 원칙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잘못한 것은 고쳐야 하는데 이를 아예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극이 싹튼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무리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확산된다면 공직사회의 근간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김원배 사회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