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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만 17점 ‘백제 블랙박스’…12시간 만에 날림 발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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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71년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무덤이 약 1500년 만에 발굴된 때로부터 꼭 반세기가 흘렀다. “한국 고고·역사학을 바꾼 기념비적 사건” “되풀이돼선 안 될 실패의 거울”로 동시 조명되는 무령왕릉 발굴을 통해 문화재 발굴 및 보존과학 50년사를 3회에 걸쳐 돌아본다.

무령왕릉 발굴 50년 ① #1971년 배수로 공사 인부 삽에 발견 #일제 때 발굴·도굴 피해 살아남아 #삼국시대 신분 확인된 유일한 ‘능’ #졸속 조사, 유물 처리 미흡 반성 #2년 뒤 천마총 제대로 발굴 계기로

“무령왕릉에선 총 17점의 국보가 나왔는데, 단일 무덤에서 이렇게 나온 경우가 없죠. 그중 첫손에 꼽는 게 지석입니다. 삼국시대 어느 무덤에도 없던 유물의 절대 편년을 제시함으로써 고고학과 고고미술사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은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이뤄진 대사건이다. 사진은 발굴 초기에 무덤 입구의 흙더미를 제거하는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1971년 무령왕릉 발굴은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이뤄진 대사건이다. 사진은 발굴 초기에 무덤 입구의 흙더미를 제거하는 모습.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올 상반기 무령왕에 관한 대중 역사서 『끝나지 않은 신화』를 출간하는 정재윤(사학과) 공주대 교수의 설명이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 공사 인부의 삽날 끝에 무덤 벽돌이 걸리지 않았다면 백제사, 아니 삼국사 전체가 오래도록 암흑이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여기서 말하는 지석은 국보 163호로 묘지석, 능석이라고도 불리는 돌판이다. 땅을 사서 무덤을 쓴다는 내용도 들어 있어 매지권이라고도 불린다. 무령왕릉에선 왕과 왕비의 지석이 각각 나왔다. 왕의 지석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이름과 함께 계묘년(523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출생, 재위, 사망 연도가 이렇게 확실한 삼국시대 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무령왕릉과 천마총 발굴(1973년)에 잇따라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신라 무열왕릉도 있긴 하지만 실제 위치가 특정되거나 발굴이 이뤄진 건 아니다. 고고·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삼국시대 ‘능’은 무령왕릉뿐”이라고 강조했다.

관모장식·금귀걸이 부장품 수천 점

무덤 내부 널길에서 발견된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와 그 앞에 나란히 놓인 왕과 왕비의 지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덤 내부 널길에서 발견된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와 그 앞에 나란히 놓인 왕과 왕비의 지석.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 때 발굴·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백제 고분이기도 하다. 공주 백제 유적은 일제강점기 공주고보 교사로 일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에 의해 샅샅이 털렸다. 가루베는 공주를 떠날 무렵인 1940년 스스로 “백제 고분 1000기 이상을 조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신라의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꾼이 무너뜨리지 않고 유물을 빼돌리기 힘든 반면, 백제는 돌방무덤 아니면 전축분(벽돌무덤)이라 입구가 한번 노출되면 훼손이 쉽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송산리 6호분 바로 옆에 위치했던 무령왕릉은 이들 눈을 피해 1500년 만에 기적적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온전히 보존됐다 하더라도 백제 고분은 상대적으로 부장품이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무령왕릉에선 국보 17점을 포함한 유물 수천 점이 쏟아졌다. 특히 얇은 금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금속공예는 삼국 안에서도 탁월한 경지다. 엇비슷해 보여도 왕 관모장식(관 꾸미개)은 타오르는 여러 겹의 불꽃 모양이고 왕비 것은 막 피어오르는 연꽃을 닮았다. 총 5쌍의 금귀걸이와 2개의 금목걸이, 신수무늬거울(神獸鏡)과 은탁잔, 은팔찌 등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다’(儉而不陋, 검이불루)는 백제미의 진수를 드러낸다.

6세기 한·중·일 무역·예술 교류 밝혀

그래픽=정근영 디자이너

그래픽=정근영 디자이너

이 밖에 다양한 부장품은 당대 동아시아 무역 교류에 중요한 시사점을 안긴다. 정재윤 교수는 “중국제 청자·동전꾸러미, 일본산 금송으로 된 관 재료, 동남아 원료인 구슬 유물 등을 통해 6세기 백제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권오영(국사학) 서울대 교수도 “6세기 전반은 백제, 양나라(중국), 일본 간에 유례없이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라면서 “한·중·일, 나아가 동남아까지 학문과 예술이 교류한 흔적이 무령왕릉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짚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송산리 고분군을 포함한 백제역사지구가 등재됐을 때도 이 같은 ‘백제 유물의 세계성’이 적극적으로 강조됐음은 물론이다.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고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신라 위주로 쓰인 데다 백제 유적이 극히 적은 편인데, 무령왕릉 덕에 백제사 연구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무령왕릉 발굴은, 그러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무덤 내부 유물 촬영부터 최종 수습까지 불과 12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초고속 발굴’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힘으로 대규모 고분 발굴을 한 적 없던 데다 ‘도굴되지 않은 백제 왕릉’이라는 대사건 앞에 언론·여론은 물론 발굴단도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쓸어담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의 속도전이었다. 이 때문에 찬찬히 발굴했다면 놓치지 않았을 숱한 고대사의 실마리가 그대로 실종됐다. 50년이 지나도록 무령왕릉이 ‘반면교사’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이유다. 반면에 그런 패착 때문에 바로 2년 뒤 경주 천마총 발굴 때부터 유적 조사의 ABC가 정립된 계기도 됐다. 최병현 명예교수는 “당시 성급·미흡한 유물 보존 처리에 대한 반성으로 이후 보존과학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늘어날 수 있었다”면서 “반성은 반성대로 하되, 새로운 관점의 탐구로 더 많은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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