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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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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우리를 도와 주세요. 우리나라의 미래를 살려 주세요. 큰 힘이 되어 주세요.” 앳돼 보이는 여성의 애절한 하소연이 반복해 울려 퍼졌다. 지난주 금요일 미얀마 양곤의 한국대사관 앞에서 촬영된 영상 속에서 젊은 남녀 30여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국어 발음이 정확한 것으로 보건대 현지 대학의 한국어과 학생들로 추정된다고 영상을 보낸 교민이 설명했다. 3분짜리 영상을 다 보기 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얀마의 현재는 우리의 과거와 겹치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염원을 불태우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쿠데타 저지 미얀마 청년 시위대 #한국 대사관 앞 눈물의 하소연 #민주화 이룬 나라의 책임에 호소

또 다른 영상 속 청년은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한류를 사랑하고 응원하듯이 우리의 민주화를 위해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10여 년 전 취재차 양곤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알게 된 현지 청년도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국립 양곤대의 컴퓨터공학도인 청년은 인터넷에 접속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군부 정권의 차단 때문이었다. 접속도 못하고 이론으로만 인터넷을 공부한다는 얘기에 나는 말을 잃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한국을 정말로 동경하고 부러워합니다. 비슷한 시기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는데 한국은 민주화도 이뤘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했잖아요.”

미얀마가 2016년 문민정부를 출범시키기까지는 몇 번의 좌절과 희생을 맛봐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여 이룬 민주화가 군부 쿠데타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이르자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강경 진압으로 희생자가 나왔고, 더 큰 유혈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시민들에게 남은 것은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길뿐이다. 영상 속 청년들은 “미얀마 군사 쿠데타를 인정해 주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고 쓴 피켓을 들고 있었다.

국제사회는 군부 규탄 대열에 섰다. 가치외교를 중시하는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앞장을 서고 G7(주요 7개국)이 공동성명을 냈다. 향후 사태 전개에 따라 국제 제재가 본격화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도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온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건 강대국 눈치를 보다 마지못해 따라가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한국을 D10(민주주의 10개국)의 일원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우리는 발전 도상에 있는 나라들엔 롤 모델과 같다. 식민지와 전쟁, 군사정권의 긴 터널을 지나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한 경험 때문이다. 현 정권의 주축은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것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이들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내건 국제 연대 동참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시험대는 미얀마뿐이 아니다. 홍콩 사태, 위구르 인권 문제 등은 물론 북한 인권 문제에까지 우리의 입장과 원칙을 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 속 우리의 자화상은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최근 일어난 일만 해도 그렇다. 한국은 지난주 57개국이 서명한 외국인 구금 규탄 선언에 불참했다. 중국·북한 때문이다. 당장 미얀마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34년 전 추락한 대한항공 858기 동체 인양 문제로 미얀마 군부와 협의 중이란 사실을 공개한 것도 의아스러운 대목이다. 아웅산 수지 정부 시절 합의해 놓은 일에 차질이 없도록 물밑 협의를 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쿠데타 정권 인정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군부와 협의 중이란 사실을 공개해 공연한 오해를 살 필요가 있을까. 다른 장관도 아닌 외교장관의 발언이라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한류(韓流)가 대중문화 산업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미얀마 청년의 동영상은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이뤄낸 우리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모범적으로 가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한류 자산이란 점이다. 세계인들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보고 있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