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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학교 못 가는 서울 아이들, 농촌으로 유학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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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코로나 시대가 만든 역발상 교육실험 현장

서울에서 전남 순천시로 유학 간 세 어린이. 이기민(맨 오른쪽)·정승호씨 부부의 아들과 조카다. 육아 휴직을 신청한 정씨가 뒤에 보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등교할 낙안초는 재학생 60명 이하의 소규모 학교라서 지난해 5월부터 줄곧 대면 수업을 했다. 이상언 논설위원

서울에서 전남 순천시로 유학 간 세 어린이. 이기민(맨 오른쪽)·정승호씨 부부의 아들과 조카다. 육아 휴직을 신청한 정씨가 뒤에 보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등교할 낙안초는 재학생 60명 이하의 소규모 학교라서 지난해 5월부터 줄곧 대면 수업을 했다. 이상언 논설위원

대문으로 들어서자 세 어린이가 마당 구석에 있는 텃밭에서 모종삽으로 흙을 떠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땅을 파며 즐거워했다. 전날 인터뷰를 수락한 이기민(39)·정승호(38)씨 부부는 아이들을 소개했다. 다음 달에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남자 아이는 부부의 아들이고, 초등 4학년, 2학년이 되는 자매는 부부의 조카다. 이들을 만난 곳은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한옥마을에 있는 집이었다.

서울시교육청 모집에 82명 참여 #전남 지역 20개 초·중에서 유학 #체류비 지원, 큰 비용 들지 않아 #학부모 “아이 뛰놀게 하고 싶어”

이 가족은 전날인 19일에 서울 구로구에서 그곳으로 내려왔다. 새 학기에 아이들을 낙안초등학교로 등교시키기 위해서였다. 학교는 집에서 200m쯤 떨어져 있다. 부인 정씨는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왔다. 일단 한 학기 동안 이곳에 살며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이 좋다고 하면 연말까지 머무를 생각이다”고 말했다. 이씨가 “형도 아이들을 이곳으로 보내고 싶어해 두 조카를 데리고 왔다. 나는 서울에서 회사 다니며 주말에 이곳으로 내려올 계획이다”고 설명했다.

이씨 부부가 아이의 시골 유학을 결심한 것은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말 전남 지역 학교로 가는 ‘농산어촌 유학’ 자원 가정을 모집한 데 따른 일이다. 82명(55개 가정)의 서울 학생이 다음 달 개학 날부터 전남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등교하게 됐다. 그중 55명은 어머니 또는 아버지와 함께 체류하고, 23명은 부모와 떨어져 지역 주민 집에서 홈스테이 형태로 지내고, 4명은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82명 중 66명이 초등학생, 16명이 중학생이다.

82명을 서울의 11개 교육지원청으로 구분해 보면 성북강북이 15명으로 가장 많고, 강남서초가 12명으로 그 다음이다. 중부가 10명, 강서양천이 9명, 북부가 9명으로 그 뒤를 잇는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강남·서초·송파구 학생이 20명으로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강남에선 농촌 유학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고 말했다.

부인 정씨에게 아이의 농촌 유학과 주말 부부 생활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물었다. 정씨는 중소 게임 개발업체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해왔다. 남편 이씨는 온라인 쇼핑몰 운영 기업의 개발자다.

서울시교육청과 전남교육청이 만든 농촌 유학 홍보 영상의 한 장면.

서울시교육청과 전남교육청이 만든 농촌 유학 홍보 영상의 한 장면.

무엇이 ‘하방’을 마음먹게 했나.
“지난 1년간 아이가 내내 집에만 있었다. 학교에 간 날이 별로 없다. 입학식도 집에서 온라인으로 했다. 영어 학원 수업도 원격으로 진행됐다. 아이가 아파트에서 쿵쿵거리며 뛰어다니는 경우가 많았고, 아랫집에 폐 끼칠까 봐 ‘뛰지 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올해도 비슷하게 지낼 것을 생각하니 암담했는데 마침 아이 학교에서 농촌 유학에 대해 알려줬다.”
학원이 없는 곳인데, 공부 걱정이 있지는 않나.
“여기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영어를 가르쳐 준다고 한다. 공부에 대한 걱정은 별로 없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기 바란다. 농작물을 함께 길러 보고, 고흥의 갯벌에 자주 갈 계획이다. 어제 아이들에게 모종삽을 사 줬더니 신이 나서 땅을 판다. 마스크 안 쓰고 밖에서 노는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윤스테이(방송 프로그램)에 나오는 데 같다며 이 집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 이 근처에 서당(이화서당)이 있는데, 비용을 받지 않고 아이들을 받아주겠다고 한다. 한자를 배울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예상되는 불편한 점은.
“새벽 배송이 안 되고, ‘배달의민족’으로 주문할 수가 없으니 음식 만드는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도 치킨, 피자는 자주 먹기 어렵다고 알려줬다. 가족의 식습관을 바꾸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가 있다.”

82명의 서울 학생이 다니게 될 전남 지역의 20개 학교(초 13, 중 7)에서는 지난해 봄 코로나19 확산 초기 때 외에는 줄곧 대면 수업이 이뤄졌다. 순천·담양·곡성·화순·강진·영암 등지에 있는 이들 학교는 전교생 60명 이하의 소규모여서 등교 제한 대상이 아니었다. 광주광역시를 제외한 전남 지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831명(22일 기준). 18개 광역 지자체 중 세종(215명), 제주(561) 다음으로 적다. 831명은 요즘 서울에서 한 주에 발생하는 확진자 수에도 못 미친다.

서울시교육청이 농촌 유학 프로그램에 응한 가정을 상대로 지원 이유를 묻는 설문조사(학부모 36명 참여, 복수 응답 가능)를 했다. ‘등교 수업 일이 많아서’에 15명이, ‘자연 속에서 맘껏 뛰어놀게 하려고’에 26명이 동의를 표시했다. 절반 이상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아이들의 ‘집콕’ 상황 타개책으로 지방 유학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프로그램은 서울시교육청과 전남교육청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 내부 회의에서 생태 체험학습 방안의 하나로 ‘농산어촌 체류’라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몇몇 지방 교육감에게 학생 수용 의사를 물었고, 장석웅 전남교육감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희연 교육감은 “학생 30∼40명만 참여해도 다행이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많은 학부모가 관심을 보여 놀랐다. 학생들이 생태적 감수성을 키우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강원·충청·영남 등 다른 지역으로도 학생을 보낼 수 있게 프로그램을 확대해 보려 한다”고 말했다. 전남의 장석웅 교육감은 “전남 인구가 한 해 사이에 1만7000명 줄었다. 수도권 밀집화와 저출산 현상이 지속된 데 따른 일이다. 전남의 870개 학교 중 185개교가 전교생 30명 이하다. 타 지역에서 오는 학생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다. 이곳 학생들에게는 마을 밖의 새 친구를 만나는 귀한 경험이 된다. 생태 교육과 지역 균형 발전에 기여하는 농산어촌 유학을 중앙정부가 국가적 사업으로 검토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두 교육청에서 농촌 유학 프로그램에 지원한 가정에 지원금을 준다. 가족체류형의 경우 1개월 60만원이다. 유학하는 자녀가 둘이면 70만원, 셋이면 80만원이 된다. 농가 주택 임대료가 대략 그 수준이다. 체류 가족이 머물 집은 빈 농가나 펜션이다. 관할 지자체가 새 단장 작업을 했다. 학생만 주민 집에 머무는 경우엔 하숙비 월 80만원 중 60만원을 교육청에서 내준다. 농협의 후원금이 지원금으로 사용된다. 학교는 모두 공립이므로 수업료가 없다. 서울시교육청 측은 학생이 다시 서울로 복귀할 때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대상 학생은 초1∼중2다.

코로나19가 도시에서 시골로 유학 보내는 역발상 교육실험의 장을 열었다. 서울 아이들에게 뛰어놀 수 있는 자유와 자연환경이 주어진다. 지방 아이들에겐 함께 공부할 새 친구가 생긴다. 결과는 과연 모두에게 해피엔딩일까. 한 학기가 끝나는 반년 뒤쯤 실험의 첫 성적표가 나온다.

농촌 유학 신청 서울 학생 82명은

초등학생 66명

중학생(1·2학년만 대상) 16명

남학생 43명

여학생 39명

가족 함께 체류 55명

주민 집에서 학생만 체류 23명

기숙사 생활 4명

5명 이상 신청 구:

성북(14명)·종로(9명)·송파(8명)·강남

(7명)·노원(7명)·서초(5명)·양천(5명)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는 아이가 됩니다”

강진군 옴천초의 조태희 교감

강진군 옴천초의 조태희 교감

전남 강진군 옴천면은 산을 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이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접근하든 굽이굽이 난 도로를 거쳐야 한다. 700여 명이 사는 옴천면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1928년에 개교한 옴천초다. 이 학교 재학생은 28명이다. 그중 14명이 도시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다. 5명은 학교 앞에 있는 ‘산촌유학센터’라는 기숙사에서 학교에 다닌다. 나머지 9명은 부모가 함께 이주했다. 이 학교는 2013년부터 유학생 유치를 위해 나섰다. 5년 전에 기숙사가 세워졌다.

이 학교 조태희(52·사진) 교감은 “이곳으로 유학 온 아이들은 산과 들에서 뛰며 자연 친화적으로 자란다. 모든 아이가 함께 공부하고 놀며 성장한다. 한 학급 학생이 네댓 명이니 교사가 하나하나 가르친다. 경쟁이 아닌 협동을 배우며 자란다. 욕설하거나 폭력적인 아이는 거의 없다. 게임에 빠진 아이도 보기 어렵다. 대신 책을 많이 읽는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사교육 많이 받는 아이들에 비해서 학업 실력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는 아이로 자랄 가능성은 훨씬 크다. 점수 몇 점 올리는 것보다 포용력과 협동심을 기르도록 하는 게 더욱 필요해진 시대다”고 덧붙였다. 서울시교육청의 농촌 유학 프로그램 지원 학생 중 세 명이 다음 달부터 이 학교에 다닌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