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트북을 열며

교육감이 패소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21.02.22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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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천인성 기자 중앙일보 EYE디렉터
천인성 사회기획팀장

천인성 사회기획팀장

“공교육을 정상화하려는 교육개혁에 역행하는 판결이다.” 지난 18일 TV 카메라 앞에 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세화고·배재고에 내린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이 법에 어긋난다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이 나온 날이었다. 패소 소식을 들은 조 교육감과 교육청 측은 즉시 항소 방침을 밝히는 동시에 법원 판결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교육청의 배포 자료 속 표현을 빌리면 “교육청의 행정 처분에 아무런 법률적·행정적 문제가 없었으나, 고교 교육 정상화에 역행하는 퇴행적 판결로 공정한 평가 결과인 지정취소 처분을 뒤집었다.” 법원이 교육개혁, 고교 정상화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투다. 이전까지 교육청 같은 교육행정기관이 사법부 판결에 ‘퇴행’ ‘역행’ ‘뒤집었다’ 등의 언사로 비난하는 모습을 기자는 본 적 없다.

노트북을 열며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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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적’이라 비판받은 총 30쪽의 판결문을 들여다봤다. 예상과 달리 재판부는 원고(자사고) 측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자사고들은 ‘교육제도 법정주의’를 들어 지정 취소의 근거 규정이 위헌·무효라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되레 “교육환경의 변화에 따라 교육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며 교육감의 손을 들었다. ‘낙제점’(지정취소 기준)을 끌어올리고, 점수 산정 근거를 학교에 알리지 않은 행위도 “피고(교육청)의 재량 범위”라고 판단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법원이 위법으로 판단한 주된 원인은 예측 가능성이란 평가의 원칙을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재판부는 교육청이 “사후적으로 중대하게 변경된 처분 기준에 따라 소급 평가했다”고 썼다. 5년 동안의 학교 운영을 평가하면서 평가가 임박해서야 지표 변경을 알렸고, 과거 운영 실적에도 변경된 잣대를 적용한 점을 지적했다. 대입 수능에 빗대면, 달리 예고가 없어 지난해와 비슷하게 출제될 것으로 믿던 수험생에게 D-100일에야 ‘출제 과목, 출제 범위, 채점 방식이 달라진다’고 안내한 셈이다. 아무리 출제 의도가 좋고 문항이 우수한들 이렇게 ‘기본기’를 어긴 시험의 결과에 누가 승복하겠나.

숱한 학생·학교 평가 경험을 지녔을 교육청 장학관·장학사, 수십년간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했던 교육감이 왜 이런 흠결을 무시했을까. 판결문엔 담기지 않았지만 ‘자사고 폐지’란 그들의 강박관념, 조급증이 교육자·행정가로서의 이성을 마비시켰던 것으로 재판부는 본 게 아닐까 싶다. 교육감·교육청이 패소한 진짜 이유는 법원 탓이 아니라 본인들의 잘못 때문이란 얘기다.

천인성 사회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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