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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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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태윤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

웹툰 ‘송곳’은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하는 회사에 맞서는 회사원 이수인의 이야기를 그렸다. 회사 측은 그에게 판매사원을 무조건 내보내라고 지시하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노동법을 무시한 채 노동자의 인권을 말살하는 상황을 보며 혼란에 빠진다. 이수인은 우연히 노무사 구고신 소장을 만나고, 구 소장은 그에게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에서 어떻게 어린 시절부터 노동조합과 인권을 가르치는지 강의하며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얘기한다. 강의를 듣던 이수인은 구 소장에게 “프랑스 사회는 노동조합에 우호적인데 프랑스 회사고 점장도 프랑스인인 우리 회사는 왜 노조를 거부하느냐?”고 묻는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구 소장은 답한다. 이어 “여기서는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고 욕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이득을 보는데 어느 성인군자가 굳이 안 지켜도 될 법을 지켜가며 손해를 보겠소?”라고 되묻는다.

지난 10일 야당의원이 나간 후 여당의원만 표결처리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0일 야당의원이 나간 후 여당의원만 표결처리하고 있다. [뉴스1]

최근 인사청문회를 보며 송곳의 이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임명안을 재가했다. 황 장관은 국회의원 시절 병가를 쓰고 해외로 가족여행을 갔던 일, 3인 가족 한 달 생활비 60만원 논란, 자녀 편법 조기유학 등 지적을 받았다. 전문성 문제를 빼더라도 각종 논란은 풀리지 않았고, 국민의힘 의원은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을 거부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적격하다는 의견을 냈고, 대통령은 지체 없이 임명했다.

이번 정부에서 이처럼 야당 동의 없이 임명한 장관급 인사는 29명이다. 지난 17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미디어리서치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이번 황희 장관 임명 관련 의견을 묻는 말에 38.8%는 “대통령이 임명을 철회해야 한다”고 답했다. 18.0%는 “황희 장관이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했고, “대통령 뜻을 존중한다”는 의견은 36.5%였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6.8%)였다. 물론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다만 국민 10명 가운데 6~7명이 그 인사의 의미를 반대하거나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강행하는 일이 빈번하니 문제다. 인사청문회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야당과 국민의 반대를 무시해도 처벌받지 않고 욕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이득을 봐서일까.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그래도 되는 나라’가 됐는지 잘 모르겠다. 이전 정권에서 야당 반발에도 인사를 강행한 사례는 이명박 정권 17명, 박근혜 정권 10명으로 두 정권의 기록을 합쳐도 지금보다 적다. 노무현 정권땐 단 3명에 불과하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구고신 소장은 억울해하는 이수인에게 말한다. 정권을 잡은 이들이 바라보는 풍경이 국민이 보는 풍경과 비슷해지길 바라면 욕심일까.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