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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병상의 코멘터리

러시 림보..‘미국판 김어준’의 죽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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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0년 2월 러시 림보가 트럼프로부터 최고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받고 환호하고 있다. 오른쪽은 메달을 수여한 트럼프의 부인 멜라니. 연합뉴스

2020년 2월 러시 림보가 트럼프로부터 최고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받고 환호하고 있다. 오른쪽은 메달을 수여한 트럼프의 부인 멜라니. 연합뉴스

미국 극우 정치토크쇼 진행자 림보..트럼프 대통령만들기 일등공신 #여성혐오,인종차별,반이민 선동..미국 보수주의를 B급으로 만들어

1.

골프선수 미셀 위가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의 성희롱발언에 반박한 뉴스.
트럼프가 퇴임 후 처음으로 폭스와 인터뷰하면서 ‘(대선에서) 내가 이겼다고 생각한다’는 해괴한 주장.

두 뉴스는 모두‘러시 림보’의 죽음과 연관돼 있습니다.
줄리아니와 트럼프가 모두 17일 숨진 림보를 애도하면서 한 발언입니다.

미국에선 림보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합니다.

2.

림보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큰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입니다.

‘러시림보 쇼’는 극우선동방송입니다. 매일 혼자서 3시간씩 떠드는데..미국 전역에서 매일 1천500만명이 애청합니다.

림보의 열성팬은 ‘디토헤즈(DittoHeads)’라고 합니다. ‘디토’란 ‘상동’(앞의 얘기와 같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림보의 얘기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멍청이들이란 비아냥입니다.

3.

디토헤드가 열광하는 건 림보가 기본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의 첫번째 색깔은 여성혐오입니다. 남성우월주의죠.

두번째 색깔은 인종차별, 백인우월주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민에 반대합니다.
세번째 환경운동에 반대합니다. 온실가스와 기후변화를 부정합니다.

네번째..결론적으로 극보수 정치가 됩니다.

4.

림보는 이런 이슈를 공격적으로 다루어 팬들을 열광시킵니다.

여성혐오의 경우..건강보험에 피임을 포함시키자는 여대생을 향해 ‘창녀가 섹스하는데 왜 내가 돈 내냐’고 공격했습니다.

인종차별의 경우..오바마를 ‘매직 니그로’라 부르면서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대통령 자격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한 것도 림보입니다.

5.

문제는 이런 편향적 선동이 현실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림보는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이 ‘방송의 공정성원칙’을 폐지하면서 본격적인 편향 토크쇼를 시작했습니다.

‘공정성원칙’은 ‘방송이 정치적으로 공정해야 한다’는 규제입니다. 민주당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만들었습니다.

그 원칙을 공화당 레이건이 없애버렸습니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 다양성을 허용한 것입니다.

6.

림보쇼가 빅히트한 배경은..보수 유권자들이 레이건 이후 미국의 진보화에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클린턴 8년과 오바마 8년간 림보는 클린턴과 힐러리, 오바마와 미셀, 그리고 그들의 자녀까지 조롱하면서 광팬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런데 광팬들은 유권자로서 선거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그 결과 공화당 정치인들이 림보의 말을 따라하는 극우가 됩니다. 그 결정판이 트럼프입니다.

7.

그래서 정치평론가들은 레이건의 격조있는 보수주의가 림보 때문에 B급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합니다.

레이건은 작은 정부와 개인의 자유, 가족과 종교의 중요성 등 보수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림보와 트럼프로 대표되는 극우는 여성혐오와 인종차별, 그리고 황당한 음모론의 상징처럼 추락했다는 지적입니다.

8.

재밌는 건..림보를 보면 김어준이 떠오릅니다.

정치적으로 김어준이 진보라는 점은 정반대이지만..나머지 행태들은 매우 유사합니다.

김어준은 보수정권 시절 ‘가카XX’‘쫄지마XX’등과 같은 B급 정서와 표현으로 진보성향 광팬을 모았습니다.
남성우월주의가 깔린 마초끼, 온갖 정치 음모론을 매일 라디오에서 쏟아내는 모습도 흡사합니다.

9.

더 유사한 건 김어준 애청자들이 정치세력을 형성한다는 점이죠.

이들은 김어준의 얘기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김어준이 뭘 잘못해도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에게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친문, 혹은 대깨문입니다.
여권 정치인들은 이들의 눈치를 봅니다.

10.

선동가와 광팬, 그리고 현실정치와의 관계가 정치적으로 간단치 않습니다.

이런 구조가 고착화될 경우 내부비판이 불가능한 가운데 정치적으로 점점 더 편향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이념의 퇴행이 우려됩니다.
오죽하면 CNN이 ‘트럼프는 림보가 만든 프랑켄쉬타인’이라 비유했겠습니까.
〈칼럼니스트〉
2021.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