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전문기자 프리즘] 연구재단, 칸막이, 그래도 수출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24호 31면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전진성 교수의 2015년 책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천년의상상)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알쏭달쏭한 제목을 붙여 봤다. 제목의 연구재단은 한국연구재단. “국가 기초연구지원시스템의 효율화 및 선진화를 목적으로 한국과학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이 2009년 통합돼 출범했다. (재단 홈페이지 www.nrf.re.kr) 시나리오가 그려지시나. 책이 거둔 예외적인 성공, 그 이면의 고충을 얘기하려는 거다. 여기서 고충은, 전 교수 말대로라면 우리 학계의 속 좁은 칸막이 풍토, 그걸 걸러내지 못하는 연구재단의 영혼 없는 지원 체제와 관련 있다.

해외서 인정 『상상의 아테네』 #정작 국내 연구지원은 끊겼었다

먼저 성공 이야기. ‘깡패 같은’ 분량(783쪽이나 된다!), 만만치 않은 가격(3만2000원), 묵직하면서도 손에서 빠져나가는 미끌거리는 내용이다 보니 불티나게 팔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판매 선방하고 있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3쇄, 4000부를 찍었다고 한다. 뜻밖에도 출판계·학계에서 어렵지 않게 이 책의 애호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책 내용에 설득당해 전 교수의 대중 강연을, 자기 출판사의 저자가 아닌데도 일부러 찾아가 들었다는 출판인도 기자 주변에는 있다.

최근 전해진 수출 소식은 이를테면 화룡점정. 2019년 일본 호세이대 출판부에서 일어 번역판 『虛像のアテネ』가 출간된 데 이어 올 초 영국의 전통 있는 루트리지 출판사에서 영어판 『Imaginary Athens』가 출간됐다.

유명 해외 출판사에서 인문 교양서 한 권 출간된 게 무슨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호세이대 출판부는 70년 역사가 넘는다. 학술적 가치가 높은 서양 고전을 많이 출간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상상의 아테네』와 같은 한국 단행본은 출판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거다. (책과사회연구소 백원근 대표) 영국의 루트리지도 마찬가지. 1836년 설립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학술 출판사 가운데 하나다. 문학 이외의 분야에서 한국 정부의 지원 없이 단행본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 (경희대 이택광 교수) 천년의상상 출판사는 “구한말 이래 성장해온 우리나라 서양학의 본격적인 세계 진출을 알리는 쾌거”라고까지 선전한다.

이제부터 고충. 이런 책이 하마터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했다. 문제의 연구재단이 2012년 약속했던 재정 지원을 도중에 중단하면서다. 『상상의 아테네』는 학제간 연구의 결과물이다.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독일 현대사학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 교수는 역사적 기억과 망각의 문제, 그런 것들이 도시 공간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천착해 왔다. 『상상의 아테네』가 정확하게 그런 주제를 건드린다. 19세기 독일 통일 과정에서 국가적 정체성의 상징이 목말랐던 프로이센이 과거 그리스의 이상적인 도시 설계를 베를린에 끌어들였고, 독일에서 ‘근대’를 수입한 일본이 베를린의 모습을 본 따 도쿄에, 이어 식민지 경성(서울)에 이식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말하자면 아테네의 어떤 흔적이 이질적인 세 도시 사이를 흐른다는 얘기다. 이런 연구를 위해 전 교수는 일본사는 물론 건축사까지 들여다봐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영역 침범’이 연구재단의 지원 중단을 불렀으리라는 게 전 교수의 심증이다. 일본사·건축학 전공으로 보이는 익명의 심사위원들이 자료 부족을 이유로 지원중단을 결정했다는 주장이다.

2012년이면 거의 10년 전이다. 지금은 다르지 않을까.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조한욱 교수는 “연구재단 심사에서 학벌·전공에 따른 나눠 먹기 관행이 지금이라고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더 심하다”고 했다. 문제가 있다면 해결책임은 연구재단에 있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