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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오늘날 호텔·모텔같은 ‘카라반사라이’…무역 핵심기지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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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교통의 허브된 숙박시설

터키 동부 카파도키아 지방의 아크사라이에 남아 있는 카라반사라이 . 1229년 셀주크의 술탄이 건설했다. 넓직한 중정(中庭)과 소형 모스크 등을 갖췄다. 카라반사라이는 옛 실크로드의 길목에 세워졌는데, 장거리 이동에 지친 상인들이 쉬어 가는 곳이었다. [사진 김호동]

터키 동부 카파도키아 지방의 아크사라이에 남아 있는 카라반사라이 . 1229년 셀주크의 술탄이 건설했다. 넓직한 중정(中庭)과 소형 모스크 등을 갖췄다. 카라반사라이는 옛 실크로드의 길목에 세워졌는데, 장거리 이동에 지친 상인들이 쉬어 가는 곳이었다. [사진 김호동]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해외여행을 즐겼다. 머나먼 이국의 자연과 풍물을 체험하면서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답답함을 해소하곤 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놀랄 만큼 발전한 항공 기술은 20세기 후반 인류에게 역사상 볼 수 없었던 대여행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주요 길목에 세운 숙박·휴식 장소 #지중해~중국 잇는 핵심기지 역할 #13~14세기 몽골제국 팽창 떠받쳐 #21세기 인력·문물 교류의 원조격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원거리 여행은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호기심과 여가를 위한 개인 여행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상인이나 사신 혹은 종교인 등이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갖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경우에도 상당한 시간과 경비는 물론 이루 말하기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실크로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단길’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부드러운 어감, 석양을 등지고 아스라한 모래 구릉 위를 줄지어 가는 낙타 행렬이 떠오르는 로맨틱한 정경은 우리도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중국 개방 이후 실크로드가 패키지여행 상품으로 인기를 누렸던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과거 실크로드를 실제로 오갔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는지를 웅변한다. 1세기 후반, 중국 후한 시대에 나온  『한서(漢書)』를 보자. 중앙아시아 파미르 산맥을 넘어가는 험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대두통(大頭痛)과 소두통(小頭痛)의 산, 적토(赤土)와 신열(身熱)의 비탈길을 지나면, 사람들은 몸에서 열이 나고 창백해지며,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는데 나귀와 가축도 모두 마찬가지다. 길이 좁은 곳은 1척 6~7촌(50㎝)이고 길이는 30리(1.2㎞)나 뻗어 있다. 험악하고 측량할 수 없는 심연에 닿아 있어, 행인들은 말을 탄 사람이건 걷는 사람이건 서로 붙잡고 끈으로 서로 끌면서, 2000여리(800㎞)를 지나서야 비로소 인도에 도착한다.”

목숨 걸고 여행한 사신·승려·상인들

13~14세기 몽골 제국의 역참 네트워크

13~14세기 몽골 제국의 역참 네트워크

또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쓴 당나라 승려 현장(玄奘)은 돈황을 지나 하미에 이르는 300여㎞ 사막길을 지날 때 오로지 ‘백골과 말똥’만을 이정표로 삼았다고 한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수백 명의 군대가 행군하는 모습의 신기루를 보기도 했고, 밤에는 요괴가 불을 토하며 별처럼 빛을 뿜어냈다고 한다. 닷새 동안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실크로드가 이토록 지난한 길이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동서 문명 가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왕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선 사신들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구하러 떠난 승려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돈벌이를 위해 길을 나서는 상인들은 왜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원거리 무역을 감행했을까. 물론 그들이라고 지리적 거리와 자연적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교역을 위한 기본 조건은 갖춰져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현장 법사

현장 법사

과거 실크로드 노상에는 비교적 안전한 여행과 숙박을 위한 시설들이 마련돼 있었다. ‘카라반사라이’(caravansaray)라고 불리는 대상숙(隊商宿)이 가장 대표적이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각지의 주요 교통로를 따라 널리 분포했다. 오늘날의 호텔이나 모텔에 비견될 수 있는 곳이다. 낙타나 나귀에 상품을 싣고 이동하는 상인들이 해가 지면 짐을 부리고 가축에게 꼴을 주며, 자신들은 휴식과 숙박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흔히 이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에는 가축들이 묶여 있고 사람들은 회랑으로 연결된 이층에 머물렀다.

지중해에서부터 당나라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 연변에 위치한 크고 작은 도시에는 수많은 대상숙이 세워졌다. 지방 유력자나 부호가 운영하는 곳도 있었지만 때로는 나라의 군주가 많은 자본을 투여해 지은 크고 화려한 곳도 있었다. 터키나 이란에서는 현재까지도 그 유적을 볼 수 있다.

그중 일부는 대규모 거류지로 발전해 교역의 핵심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3~9세기 유라시아 내륙 교역을 장악했던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각지에 이러한 거류지를 형성했다. 당 제국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 상인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그들 가운데 대표 격인 인물에게 ‘살보’(薩寶)라는 정5품 관직을 줘서 감독하도록 했다. ‘살보’는 ‘대상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소그드 상인 다수는 사마르칸트나 타슈켄트 같은 대도시에 있는 고용주가 파견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외지에서 장사해서 수입을 올리면 그것을 본국으로 송환하고 이윤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 4세기경 소그드 상인 한 사람이 본국으로 보낸 편지가 발견됐는데, 순품 사향 800g을 사서 보내니 그것을 팔아서 남는 이익의 일부는 고향에 두고 온 자기 자식의 교육비로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향의 가치는 당시 은 27㎏, 현재 시세로 치자면 4000만원 정도 된다.

동양문화에 대한 서구의 이해 높여

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

13~14세기 몽골 제국 시대에 실크로드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유라시아 내륙 전역에 걸쳐 ‘잠’(jam)이라는 역참 시설이 들어서면서 왕래가 보다 원활해졌다. 제국의 영역이 급속하게 팽창하자 각지의 물자를 수도 카라코룸이 위치한 몽골 초원으로까지 신속하게 수송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지만, 점차 사신들과 고위 관리, 그리고 지배층과 손잡은 상인들까지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주로 초원 지역에 들어섰지만 점차 범위가 확대돼 서쪽으로는 러시아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 전역에 역참이 세워졌다. 말 그대로 유라시아를 망라하는 대규모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몽골 제국의 역참망은 실크로드 교통에 혁신을 가져왔다.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은 물론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여태껏 동아시아를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던 유럽 선교사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선교사들은 유라시아 동쪽 끝에서 만난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유럽은 비로소 세계를 향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 같은 이탈리아 상인들도 찾아왔다.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에는 역참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나온다. 즉 25마일에 하나씩 들어선 “크고 멋있는 숙사”에는 300~400마리의 말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으며, “사치스러운 비단으로 장식된 화려한 침대와 물건”이 준비돼 있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통과 무역은 대상숙과 거류지를 근거로 원활하게 이뤄졌다. 나아가 몽골과 같은 초원의 유목민들이 유라시아 규모의 역참 네트워크를 건설함으로써 그 속도와 규모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역사상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간의 교류는 바로 사막의 오아시스 주민과 초원 유목민들이 세우고 운영한 카라반사라이와 역참을 허브로 해서 작동될 수 있었던 것이다.

4세기 소그드 상인 “중국 황제가 도망쳤다”

제2 서한

제2 서한

1907년 영국 학자 스타인(A Stein)이 현재 중국 서부에 위치한 돈황 부근의 한 봉수대에서 편지 한 뭉치를 발견했다. 4세기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소그드 상인들의 모습을 전해주는 흥미로운 자료다. 특히 중국 무역의 현지 총책이던 나나이 반닥이라는 상인이 사마르칸트에 있는 고용주에게 사향을 대량 구입해서 보내면서 쓴 제2 서한(사진)이 눈에 띈다.

반닥은 이 편지에서 중국 낙양에 훈족(Hun)이 침입해 커다란 기근과 화재가 발생하고, 결국 황제가 도망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무역 거래는 물론 당시 중국의 정세도 상세히 알리기도 했다. 이는 311년 흉노족의 공격으로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제는 남쪽으로 도망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