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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주자도 없는데 대량 득점 하겠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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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경제에디터

주정완 경제에디터

4번 타자의 힘이 단단히 빠졌다. 이래서야 야구 경기가 잘 풀릴 리가 없다. 얼마 전 새로 바뀐 감독은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친다. 주자는 아직 한 명도 나가지 못했는데 곧 대량 득점을 할 테니 기다리라고 한다. 이걸 지켜보는 관객은 조마조마할 뿐이다. 정부가 내놓은 주택 공급 정책을 야구에 비유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4번 타자는 태릉 골프장, 감독은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태릉 1만 가구도 늦어지는데 #전국 83만 가구 공급 잘 될까 #입으론 공급확대, 현실은 난관

변 장관은 지난 4일 대규모 주택공급 대책을 내놨다. 2025년까지 서울에서만 32만 가구, 전국에서 83만 가구의 주택부지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말 야당의 강력한 사퇴 요구를 무릅쓰고 문재인 대통령이 변 장관의 임명을 강행한 지 한 달여 만이다. 그만큼 변 장관으로선 야심 차게 준비한 ‘반전의 카드’였다.

부동산 시장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변 장관이 아무리 입으로 주택공급을 외쳐도 현장에서 실제로 주택공급이 이뤄지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임기는 1년여밖에 남지 않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성명서에서 “남은 임기 1년 남짓 단 한 채도 입주될 가능성이 없고 10만 채도 착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비판했다. 변 장관이 발표한 주택공급 대책은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오히려 무분별한 투기 수요를 부추길 것이라고 경실련은 주장한다.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얻으려면 이미 발표한 주택공급 대책부터 제대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어제의 약속을 미적거리는 사람이 오늘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서울 노원구 태릉골프장(1만 가구)을 들 수 있다.

지난해 8·4 부동산 대책에서 정부는 수도권 주택공급을 위한 신규 택지로 21곳(3만3000가구)을 제시했다. 그 중에선 군 시설인 태릉골프장이 가장 규모가 컸다. 나머지 20곳 중에는 100~200가구짜리 자투리 땅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서울에선 비어 있는 땅을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시장의 관심이 태릉골프장에 쏠린 것도 당연했다.

당시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언론 브리핑에서 “(주택)공급에 대해 걱정하는 분이 많기 때문에 사전청약을 늘려 이런 수요를 사전에 분산시키면서 안심하게 하겠다”며 “태릉도 사전청약을 도입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실무 책임자였던 김흥진 국토부 주택토지실장(현 국토도시실장)은 “태릉골프장 같은 경우 내년(2021년) 말쯤에 사전청약을 받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국토부는 지난해 9월 1일 보도자료에서도 “태릉골프장 등 6만 가구에 대해서는 2021년 하반기부터 사전청약 실시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후 6개월가량 지났지만 시원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원래 구상대로 올해 말에 태릉골프장에서 아파트 사전청약을 받으려면 지금쯤은 사업이 상당히 진행됐어야 한다. 언론의 지적이 나오자 국토부가 최근 설명자료를 내기는 했다. 지난해 10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국토부 장관에게 태릉골프장을 공공주택지구로 지정해 달라고 제안했다는 내용이다. 두 달 전 언론에 배포한 설명자료와 비교하면 거의 판박이다. LH는 국토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산하 기관이 담당 부처에 사업 제안서를 냈다는 것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진척 사항이 없다.

태릉골프장의 땅 주인은 정부(국방부)다. 민간 토지주 등과 보상 문제로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정부 안에서만 의견을 하나로 모으면 일사천리로 주택건설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지난해 7월 정세균 총리와의 회동에서 태릉골프장 활용 방안에 힘을 실어줬다. 정부가 소유한 땅에서 이렇게 사업이 늦어진다면 민간이 소유한 땅에선 더욱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역대 정부 중 가장 야심찬 주택공급 계획이라면 1980년 9월 전두환 정부가 발표한 주택 500만 가구 건설계획을 꼽을 수 있다. 당시 김주남 건설부 장관이 발표했다. 그때는 신문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지만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구체적인 실행이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500만이란 숫자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집값을 안정시키려면 주택이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는 확신을 시장에 줘야 한다. 변 장관은 83만 가구를 제시했다. 41년 전보다는 숫자가 작아졌지만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다시 야구에 비유하면 믿음직한 투수도, 한 방이 있는 강타자도 보이지 않는다. 프로야구 원년의 삼미 슈퍼스타즈가 떠오른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주정완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