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사법 장악이라는 포퓰리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한 해 ‘포퓰리즘을 쏘다’를 월 1회꼴 연재했다. 남미 포퓰리즘의 원조인 후안 페론부터 빅토르 오르반까지 세기의 포퓰리스트를 다뤘다. 포퓰리즘의 세기라는 21세기, 대한민국이 닮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하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내겐 반면교사였지만 정부·여당엔 타산지석이었나 보다. 포퓰리즘을 경계하기는커녕 흉내 내기 바쁘다. 편 가르고 돈 뿌리기도 모자라 언론과 사법까지 손에 쥐겠다고 나섰다. 판사 탄핵은 사법 장악의 시작이다. 종착역은 어디쯤일까. 성공한 포퓰리스트들의 궤적에 실마리가 있다.

내 편엔 춘풍, 상대편엔 추상 #정의 독점 땐 무서울 게 없다지만 #나라·민주주의 다 망칠 재앙 불러

집권한 포퓰리스트는 필연적 독재로 흐르는데(『누가 포퓰리스트인가』) 이때 꼭 필요한 게 사법 장악이다. 사법 장악이야말로 포퓰리즘 독재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내게는 춘풍 남에겐 추상, 사법의 차별화가 가능해진다. 정의는 독점, 불법은 타자화(他者化)하면 무서울 게 없다. 남미의 우고 차베스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본보기다. 차베스는 1997년 헌법의회 선거에서 131석 중 12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자 사법부터 손에 넣었다. 의회를 동원해 대법원 대신 ‘사법비상위원회’를 설치, 법관을 파면할 수 있게 했다. 190여 명의 법관을 정직시켰다. 시민부를 만들어 야당이 맡았던 공직자 부패 감시 역할을 시민에게 넘겼다. 2009년엔 차베스가 구속한 은행가를 석방한 판사를 체포, 구속했다.

차베스를 이은 마두로는 더했다. 2015년 야당이 선거에서 이기자 대법원을 동원해 의회를 무력화했다. 대법원은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무더기로 폐기했다. 제헌의회를 소집해 야당이 불참하는 선거를 강행했다. 사법의 힘으로 의회를 무력화하고 헌법까지 바꾼 것이다.

사법 장악의 백미는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다. 시작은 2010년 여당인 피데스가 3분의 2 넘는 의석(386석 중 263석)을 얻으면서다. 의회는 즉시 법을 고쳐 판검사의 정년을 70세에서 62세로 낮춘 뒤 판사 274명을 강제 퇴직시켰다. 헌법재판관 수를 11명에서 15명으로 늘린 뒤 친여 재판관으로 채웠다. 게다가 헌재가 과거 판례를 인용할 수 없게 했다. 친여 헌재는 정권 입맛대로 과거를 부정하는 친정부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됐다. ‘선출된 권력’이 어떻게 ‘민주적 절차’를 허무는지 보여준 ‘최악의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오르반은 한술 더 떠 2018년엔 행정법원 설립안을 밀어붙였다. 선거나 부정·부패, 집회·시위 등 정부 관련 사건은 기존 법원이 아닌 행정법원이 맡도록 했다. 행정법원 판사의 임용 권한은 대법원장이 아니라 법무부 장관이 갖도록 했다. 아예 사법을 행정의 시녀로 삼은 것이다. EU의 극렬 반대로 오르반은 설립안을 무기한 보류한 상태지만 “언제든 재추진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쯤 와 있나. 검찰 개혁이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정부·여당은 검찰총장을 내치려다 잘 안 되자 검찰의 힘을 빼는 입법을 한 바닥 늘어놓는 중이다. 공수처와 검경 수사권 조정에 이어 이번엔 중대범죄수사청을 들고 나왔다. 선거·공직자·부패 등 6대 중범죄 수사를 검찰에서 빼낸다는 것이다. 검찰판 ‘행정법원’이다.

다음 수순도 짐작할 만하다. 판사 한 사람 탄핵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미 현 정권에 장악돼 있다. 대법관 14명 중 11명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했다. 헌법재판관 9명 중 6명도 현 정권이 골랐다. 문제는 그런데도 눈치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몇몇 소신파 판검사들이다. 그것마저 못 참겠다는 게 정부·여당의 속내다. 판사의 사상을 검증하는 입법, 오르반식 행정법원이 다음 선택지가 아니란 보장이 없다.

민주주의가 시장 지배적 소수 집단(포퓰리스트)과 맞서 전투를 벌일 때 종국적인 결과는 재앙일 수 있다. 가장 안 좋게는 민주주의와 나라, 둘 다 망가질 수 있다. 여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식과 선거다. 아직 대한민국엔 돌이킬 기회가 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