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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의지 호소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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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이달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답했다. 7개월 전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북한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알렸다.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2년 전 국정원장으로 도쿄를 찾았을 때 같은 얘기를 했다. 이분들이 없는 말을 만들었을 리는 없다. 김 위원장이 “내 아이들은 핵을 이고 평생을 살아가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앤드루 김 전 미 중앙정보국 코리아미션센터장)

‘의지=현실’ 간주는 곤란 #‘비핵화 의지≠비핵화’ 상식 #조건 안 맞아 결렬 땐 흑화 #핵무력 의지로 바뀌며 악화

사실 우리 모두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2019년 1월 신년사에서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라고 공언했다. 북한에서 신년사는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 무오류의 최고존엄이 공표한 이상 이를 교본으로 삼아 북한의 각급 조직과 기구별로 정책이 수립되고 집단 학습이 이뤄진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뜻한다고 다 이뤄지지는 않는다. ‘의지=현실’이 될 수 없고, ‘비핵화 의지=비핵화’가 될 수도 없다. 의지와 현실은 다른 영역이다. 비핵화를 하려면 대가를 요구할 텐데 이 거래가 성사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비핵화 의지 표현’으로 끝난다. 신년사가 나온 뒤 다음 달인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북·미 정상회담이 바로 그런 사례다. 북한이 내놓은 ‘영변 카드’는 미국이 원했던 ‘영변과 그 이상’을 충족하지 못했고, 회담은 결렬됐다. 비핵화를 하려면 의지보다 조건과 순열을 맞추는 게 난제임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조건이 맞지 않아 비핵화가 무산되면 ‘비핵화 의지’나 ‘핵보유 의지’나 결과는 동일해진다.

서소문 포럼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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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그간 간헐적으로 진행됐던 각종 남북, 북미 접촉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일관되게 알려 왔다. 미국의 북한 체제 인정은 기본이었고, 북한 체제를 실질적으로 보장받겠다며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해 왔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군사동맹 해체다. 북한이 내건 ‘한반도 비핵화’에는 ‘남조선 비핵화’가 포함돼 있고, 남조선 비핵화는 한반도 바깥의 미국 본토에서 제공하는 핵까지 포함한 비핵화가 핵심이다. 즉 미국이 약속한 핵우산 제거가 한반도 비핵화에 포함된다. 이를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여러 조건 중 하나가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군사동맹의 해체라는 것이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은 이 방향으로 가는 초기 단계의 정박지다. 그러면서 한국을 향해선 ‘우리민족끼리’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미국과 잡은 손을 놓으라’는 요구다.

이를 토대로 보면 북한 비핵화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 견적이 나온다. 핵을 가진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고 한국과 미국이 먼저 안보적·외교적 무장해제를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북한의 이른바 ‘비핵화 의지’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항상 ‘핵무력 의지’로 흑화했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모두 그러했다. 우리는 김 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에서 “비핵화 의지” 육성을 들었지만, “새로운 길”이라는 ‘핵 증강 플랜B’도 동시에 들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모습을 강요하려 들고 공화국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중략)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였다. 북한은 이미 새로운 길을 걷는 단계에 와 있다.

2000년대 중반 대북지원 민간단체와 함께 평양 땅을 밟은 적이 있다. 그곳에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은 없었다. 방북 마지막 날 순안공항에서 짧은 체류 기간 중 얼굴을 익혔던 북측 실무자와 악수를 할 때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애잔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정서가 냉엄한 남북의 현실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 며칠 전 이 실무자는 느닷없이 취재진의 카메라를 일제히 수거한 뒤 메모리 카드를 빼내 사진을 삭제했다. 통제되지 않은 사진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눈빛으로 일순 통했다 한들 남한 인사들을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엄중한 그의 현실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비핵화 의지와 비핵화 역시 동일하다. 비핵화 의지를 부각하기에 앞서 북한의 속내엔 결코 물러서지 않을 조건이 있음을 잊지 않는 게 북한이 어떤 카드를 들고나올지를 예측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냉정해지지 않으면 망한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