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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없는 여자들’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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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모리 요시로(森喜朗) 도쿄올림픽 조직위원장의 망언에서 사임에 이르는 ‘대하 드라마’를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일본은 역시 앞서가는 초고령 사회”였다. 80대 노인과 대화한 게 언제인가 싶은데, 이 드라마의 주역은 하나같이 80대여서다.

모리 위원장은 1937년생. 일본 언론엔 83세로 나오지만 한국 나이론 85세다. “여성이 많은 회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여성은 경쟁심이 강하다” 등의 발언을 했다가 역풍을 맞자, “내가 ‘민폐 노인(老害)’이면 쓸어버리라”며 거꾸로 화를 냈다. 실망한 올림픽 자원봉사자들이 줄줄이 그만두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이 나타나 일갈한다. “자원봉사자는 또 뽑으면 된다.” 이 분은 39년생.

지난 4일 사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화를 내는 모리 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4일 사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화를 내는 모리 위원장. [로이터=연합뉴스]

하이라이트는 후임자 보도가 나왔을 때다. 사임을 결심한 모리 위원장이 찾아가 울며 ‘뒤를 부탁한’ 가와부치 사부로(川淵三郎) 전 일본축구협회 회장은 36년생. 모리 위원장보다 한 살 위다. 조직위 정관에 버젓이 적힌 선출 절차를 깡그리 무시해 무산됐지만, ‘83세에서 84세로의 계승?’이라며 일본 언론도 비판하자 그는 말했다. “늙었지만 젊은 녀석들에게 지지 않는다.” 이분들의 당당함과 뻔뻔함을 보며 깨달았다. 아, 평생 하고 싶은 말을 참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구나.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스스로 돌아보기를 포기한 무능함이 문제다.

그런 분들이 여자들에겐 ‘말이 많다’ ‘분별이 없다’며 혼을 낸다. 이번 사태로 새롭게 배운 일본어가 있으니 ‘와키마에루(弁える·분별력이 있다)’라는 단어다. 모리 위원장은 문제의 발언 중 문득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이렇게 수습한다. “조직위원회에 있는 여성 이사들은 다들 분별력이 있어, 도움이 된다”고. 그러자 화가 난 여자들이 나섰다. “그래? 분별없는 여자가 어떤 건지 보여주지.”

온라인 서명 운동을 시작했고 ‘쓸어버리겠다’며 빗자루를 들고 시위를 했다. 소셜미디어(SNS)에는 ‘#분별없는 여자(#わきまえない女)’라는 태그를 단 항의 글이 쏟아졌다. 대세에 따라 입 다물지 않고, 아닌 건 아니라고 끼어들어 회의 시간을 늘려버리는 ‘분별없는 여자들’의 반란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활발할 때도 일본은 조용했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성별 격차지수는 153개국 중 121위다(한국은 108위). 늘 그랬듯 이번에도 없었던 일처럼 넘어가나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고구마 백 개’의 체증이 조금 해소됐다.

이영희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