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자이자 민주화·통일운동에 앞장섰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89세를 일기로 2월 15일 별세했다.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이어온 고인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세상을 떠났다.
70~90년대 민주화·통일운동 앞장 #87·92년 ‘민중 후보’로 대선 출마 #“문정부서도 노점상 죽어가” 비판 #정의당 “이젠 누가 회초리 돼주나”
고인의 과거 정치 활동은 ‘민중 후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독자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1987년 대선에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기호 8번 후보였던 고인은 1987년 12월 3일 “민주연립정부안(案)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며 양김(兩金) 후보에 단일화를 공식 제안했다.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자 1987년 12월 14일 “단일화 실패 책임을 내가 지고 물러가겠다”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백 소장은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이후 열린 1992년 대선에선 끝까지 완주했다. 결과는 23만표(1%) 득표였다. 당시 고인이 내세웠던 ‘민중 후보론’은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30만표·1.2% 득표)의 완주와 민주노동당 창당을 거쳐 현재 정의당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날 정의당에서는 “(고인은) 대통령선거에 독자 민중 후보로 출마하심으로써 진보정치의 지평을 열기도 하셨다”(황순식 비상대책위원)는 평가가 나왔다.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 모자란 우리들에게 누가 회초리가 되어주실까요”라고 썼다.
생전 재야 출신 정치인들과도 관계가 깊었다. 1973년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벌였던 ‘유신헌법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직후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개최했던 ‘대통령 간접선거반대 국민총궐기대회’ 사건(일명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 등 굵직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85년 3월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서울 의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민통련에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 등이 참여했다. 민주화청년연합을 이끌었던 고(故)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도 민통련 창립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고인은 한·미 FTA 반대 운동, 용산 참사 규탄 집회 등 시위 현장에 꾸준히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7년 7월엔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노점상은 죽어가고 있다. 다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