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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자기 안위만 생각한 대법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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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법원에 제 몸을 바쳤어요. 휴가도 안 가고 국회의원 개 노릇 하면서 살았어요.”

임성근 탄핵심판 시작되는데 #“깊은 사과” 뒤에 숨은 김명수 #어떤 대법원장 될지 선택해야

2017년 3월 말, 일산 사법연수원 8층. 닫힌 문틈으로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울분을 토해낸 이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그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조사하는 판사들 앞에서 자신이 법원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특히 도드라진 대목이 있었다. ‘국회의원 개 노릇’.

그 의미가 일부나마 드러난 건 2019년 1월 검찰이 임 전 차장을 추가 기소하면서였다. 공소장에 국회의원들의 재판 청탁 의혹이 담겨 있었다. 임 전 차장은 공판 과정에서 “민원을 전달받은 건 맞지만, 재판부에 선처를 부탁한 적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외 공무가 행정처의 중요한 업무여서 민원 해결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 법원이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 부당한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의원들의 민원을 챙기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다. 사법행정권 남용은 대법원장과 몇몇 판사가 허공에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사법 권력이 청와대 권력, 국회 권력과 어우러져 서로 봐줄 건 봐주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2017년 9월, 김명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있던 때로 가 보자. 김 대법원장의 요청으로 이민걸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임성근 부장판사 등이 야당 의원 로비에 동원됐다. 현직 판사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한 것은 “또 하나의 직권남용”이란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장을 위해 판사들이 전화를 돌린 게 처음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는 ‘사법농단’ 사태로 첨예하던 상황이었다.

오해하지 말자. 농단(壟斷)은 ‘나쁜 사람들’이 ‘나쁜 의도’로 하는 게 아니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의도’로 하는 거다. “우리가 옳다”는 오만함과 “이 정도면 괜찮지 않으냐”는 안일함이 그 레시피다. 그래서 “나는 다르다”고 자신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법원장 시절 ‘사법농단’과 각을 세웠던 김 대법원장 역시 자기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일까.

더욱이 그는 의혹에 연루된 후배 판사에게 “사표 내지 마라. 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상황이 변하면서 마음도 달라진 걸까,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었던 걸까. 임성근 부장판사가 김 대법원장과 면담하면서 녹음 버튼을 누른 이유도 그 언저리에 있을 터. 그래도 녹음파일을 공개한 것엔 도무지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한 판사는 말한다. “임 부장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김 대법원장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이제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심판 절차가 진행된다. 이번 심판은 판사 한 사람의 파면 여부만 다뤄선 안 된다. 재판의 독립이란 무엇인지, 재판 독립을 지키기 위해 법원은 어떠해야 하는지, 법원과 청와대·국회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이런 쟁점들을 다뤄야만 헌법심판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그러려면 현재의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원장이 판사들에게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자신을 향해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서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면 반성하고,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져야 한다. “깊은 사과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2월 4일)는 퇴근길 한마디 뒤에 언제까지 숨어 있을 것인가. “법원 인사를 보면 오히려 제왕적 대법원장에 가깝다”는 비판에 무슨 대답이든 내놓아야 할 것 아닌가.

그간 법원엔 숱한 위기가 있었다. 누구는 국민 앞에 책임졌고, 누구는 자기 안위만 생각했으며, 누구는 고민하다가 때를 놓쳤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김 대법원장이 “여러 영향”과 “정치적인 상황”을 살피며 침묵을 지킨다면 자기 안위만 생각한 대법원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대법원장에 지명된 직후 “31년5개월 동안 법정에서 재판만 해 온 사람의 수준”을 말했다. 지금이 그 수준을 보여줄 때다.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