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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할머니 수렴청정 첫 테이프 끊은 성종대 정희왕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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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6)

조선 왕실 최초로 수렴청정했던 세조 비 정희왕후는 성종이 13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하고 왕이 20세 되었을 때 정치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수렴청정하던 대비는 왕이 성장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을 때 철렴(수렴청정을 거둠) 했다.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는 것을 ‘철렴환정(撤簾還政)’이라고 하며, 철렴이라 줄여서 지칭하는데 대왕대비는 철렴 이후에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자 20세가 될 때까지 9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큰 권력을 휘둘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정희왕후도 성종이 20세 될 때까지 수렴청정했으나 큰 비난이 없었다. 성종은 15세 이후 대다수의 직무를 스스로 처리했는데,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적 체제 속에 오히려 성종이 안정적인 시기에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기다려 준 정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는 동안 성종은 생모인 소혜왕후(인수대비)에 크게 의존했는데, 정치적 성향과 지식이 뛰어난 소혜왕후의 영향력으로 분란의 소지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 '옥중화'에서 배우 김미숙이 연기한 문정왕후. [사진 MBC '옥중화' 캡처]

드라마 '옥중화'에서 배우 김미숙이 연기한 문정왕후. [사진 MBC '옥중화' 캡처]

명종이 승하한 후 선조가 16세에 즉위했지만 왕 수업을 받지 못해 명종 비 인순왕후가 8개월간 수렴청정을 했고, 영조 비 정순왕후는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다가 왕이 15세가 되는 해부터 친정하도록 하고 철렴하였다. 정순왕후는 철렴 후에 청정을 복귀하려고 시도했으나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시대에는 6명의 대비가 7회에 걸쳐 수렴청정했는데, 그중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는 헌종과 철종 대 2회에 걸쳐 수렴청정했다. 조선왕조 후기에는 국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는 일이 거듭되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이어졌다. 순원왕후는 손자 헌종이 8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 대 정순왕후의 선례를 따라 7년간의 수렴청정을 한 후 철렴했다. 그런데 다시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있는 전계군의 아들 원범(철종)을 왕위에 올리고 3년간의 수렴청정 후 철렴했다. 그러나 철종 역시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후사로 정하고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때 고종의 나이가 12세였기에 신정왕후는 왕이 15세가 될 때까지 4년간 수렴청정했다.

이렇듯 수렴청정은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나이가 어리면서 왕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시행됐다.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선조 대 인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가 맡았다. 이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왕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섭정을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주로 대왕대비의 몫이었다. 이는 즉위한 어린 왕과의 사적인 관계, 곧 할머니와 손자와의 관계가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대왕대비는 선선대왕의 왕비로서 어린 왕을 도와 국정을 분담하고, 왕을 성장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정국을 운영한 것이다.

순조 대에 반포된 ‘수렴청정절목(垂簾聽政節目)’은 대비의 정치참여 방식과 역할, 위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왕대비는 왕이 정무를 보는 편전에서 발을 치고 5일마다, 한 달에 6번 정도 국정을 살피는 것으로 수렴청정이 시행되었으며 중요한 사안은 수시로 청대(신하가 급한 일이 있을 때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던 일)를 허락했다.

왕과 대비가 현안에 대한 보고를 함께 들은 뒤 왕이 직접 결재하기도 하고, 대비가 하교를 내리기도 했고 왕이 대비에게 뜻을 묻고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렴청정의 중요한 운영 원칙은 상소는 왕에게 직접 올려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국정 운영의 주체는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왕은 이러한 업무처리를 통해 신하와 소통하면서 정치적인 역량을 키워갈 수 있게 한 조치였다.

수렴청정은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나이가 어리면서 왕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시행됐다.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선조 대 인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가 맡았다. [사진 pixabay]

수렴청정은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나이가 어리면서 왕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시행됐다.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선조 대 인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가 맡았다. [사진 pixabay]

수렴청정할 때, 왕과 대비의 위차(位次)는 대비가 높은 자리에 앉아 존숭되었다. 왕의 위치는 조선 전기에는 대비가 중앙에, 왕은 그 서쪽에 위치하다가 19세기에는 왕이 중앙에 위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나이가 어리지만, 국정운영의 주체는 국왕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충남대 임혜련 교수는 ‘수렴청정절목’ 제정에 대해 “선조 대 이래 200년이 지나 수렴청정이 다시 행해지면서 그사이 대리청정(代理聽政.세자, 세제, 세손이 왕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행위)의 시행과 절목 제정의 영향을 받아 (수렴청정이) 제도적으로 완비된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조선에서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 대에 시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후사로 지명해 즉위하도록 했다.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나이는 4세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너무 어렸다 하더라도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제치고 13세의 성종이 즉위한 것은 정희왕후가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논의한 후 의지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즉위 후 신숙주 등이 대비(大妃)에게 같이 정사를 청단(聽斷. 송사를 자세히 듣고 판단함)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복이 적어서 이러한 자식의 흉사를 당했으므로, 별궁으로 나아가 스스로 보양하려고 한다. 더구나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해서 정사를 청단하기가 어려운데, 사군(嗣君)의 어머니 수빈(粹嬪)은 글도 알고 또 사리(事理)도 알고 있으니, 이를 감당할 만하다”고 했다.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세자빈이었던 수빈 한씨(소혜왕후)가 청정할 것을 권하였으나 소혜왕후는 왕의 어머니이긴 하지만 수렴청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희왕후가 하게 되었고, 이것이 곧 조선의 선례가 되어 이후에도 지속하였다. 정희왕후는 초기 수렴청정의 격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때 발을 설치하지 않고 신하를 면대했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조선 시대 최초로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의 형식으로 국정운영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예가 되었고 성종이 20세가 되는 해에 철렴을 하며 8년간 수렴청정을 마감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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