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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부끄러움의 DNA’가 없는 정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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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조국·윤미향·추미애 사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니 이번엔 김명수 사태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게 공통점이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실체가 탄로나자 발뺌하기 급급하다. 그땐 몰랐다, 기억이 불분명했다, 내가 시킨 게 아니다.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너절한 해명은 지루하기만 하다.

법원 독립의 사명 저버린 김명수 #사법정의 믿은 ‘촛불 국민’을 배신 #“부끄러운 마음 있어야 국가 영속” #명재상 관중의 경고 되새겨야

“국회 탄핵문제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답변서가 거짓임이 들통난 날, 김명수 대법원장은 자신의 ‘흐릿한 기억’을 탓했다. “9개월 전의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했다”고. 기억이 안 났을 뿐 거짓말이 아니다? 조국(전 법무부 장관) 사태의 데자뷔다.

딸의 동양대 총장 표창장은 ‘총장이 발급을 위임해준 것’이라던 거짓말은 부인 정경심 교수의 위조극으로 판명났다. 5촌 조카의 사모펀드 개입 사실도 탄로났다. 그런데도 “사모펀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 코링크에서 받은 대로 답변한 것”이지 “거짓말이 아니다”고 변명한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보좌관에게 군 간부의 전화번호를 주고 ‘(아들의) 휴가문제 처리했다’는 보고까지 받고도 “전화번호는 줬지만 지시한 게 아니다”는 궤변을 쏟아냈다. 횡령 혐의로 기소된 윤미향 의원(민주당)은 유용된 돈이 미국 유학중인 딸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을 반박하면서 “아이가 검소해서 학교까지 걸어다녔다”는 무협지 수준의 황당무계한 변명을 늘어놨다.

수치심을 모르는 낯 두꺼운 철면피같은 행태다. 사람이 개·돼지와 구분되는 건 부끄러움을 안다는 점이다. 법을 어기고 도덕에서 벗어난 일탈 행위가 남에게, 특히 공중(公衆)에 노출될 때 수치심을 느끼는 게 자연스런 감정이다. 『국화와 칼』의 저자인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서구 문화의 뿌리가 신이나 인간 내면에 대한 죄책감에 있는 반면, 동양 문화의 뿌리는 체면을 잃는데 대한 수치심에 있다고 분석했다. 수치심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릴 때, 종종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하는 이유다. 그러니 체면을 차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야말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 사회 형성의 요체인 셈이다.

이뿐일까. 춘추시대 제나라 명 재상 관중(管仲)은 ‘잘못을 숨기지 않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나라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국가를 영속케 하는 4가지 그물줄(禮·義·廉·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개가 끊어지면 위태로워지며, 세 개가 끊어지면 뒤집어지고, 네 개가 끊어지면 멸망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문재인 정부의 집권 세력에겐 ‘부끄러움의 DNA’가 없는 모양이다. “내가 사표를 수리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 귀를 의심케하는 이 충격 발언의 주인공이 법원의 독립성 확보를 제1사명으로 하는 대법원장이란 사실도 놀랍지만, 거짓말이 탄로난 후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이 국민을 경악케한다. 검사가 잘잘못을 가리는 직업이라면, 판사는 거짓말을 가려내는 자리다. 권력과는 숙명적으로 긴장 관계다. 삼권분립의 발명자 몽테스키외가 설파했듯이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남용하게 돼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으로 대법원장의 임기를 못박아 입법·행정 권력의 남용과 유혹으로부터 법원의 독립성을 지키도록 안전장치를 해둔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 신성하고도 엄중한 사명을 저버렸다. 보신에 급급해 집권당의 ‘보살핌’을 받는 더부살이 신세로 법원을 추락시켰다는 비난을 사는 이유다. 이런 굴종이 없다. 이는 법치가 회복되고, 법원이 사법 정의를 지킬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을 믿으며 촛불을 들었던, 그래서 ‘문재인 보유국’을 탄생시킨 국민에 대한 배신 행위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알면 뉘우치고 회개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반성도, 사과도 없다. 이 정권이 유독 사과에 인색한 이유다. “사퇴하라”는 야당 의원들의 면전에서 김 대법원장은 “더 나은 법원을 위해 한번 잘해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핍된 ‘수치심’의 자리가 ‘탐욕’으로 채워지고 있다. “짊어진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다”(조 전 장관), “흔들림 없이 책임을 다 하는 것이 저의 운명적 책무다”(추 전 장관), “(위안부) 할머니들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윤 의원). 숱하게 봐왔던 현기증 나는 데자뷔다.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신뢰가 싹튼다. 신뢰가 있어야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나랏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는 지도층이라 할 집권세력이 앞장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법을 어기고 거짓말을 하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 되레 장관·국회의원 같은 고위직에 오른다. 현란한 레토릭과 화장술로 대중의 눈을 속여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의 마음을 얻진 못한다. 신뢰가 없으면 나라는 한발짝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게 관중의 경고다.

이정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