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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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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소파에 누우면 왕이 사는 궁전이 부럽지 않다. 그 소파 위에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신문을 읽고, TV를 본다. 문제는 이 소파를 10년 넘게 쓰다 보니 가죽이 갈라져서 볼썽사납다는 거다. 여기저기 스프링까지 튀어나와서 그 자리를 피해서 앉아야 한다. 큰맘 먹고 소파를 바꿀까 했는데 버리는 일도 간단찮다. 버리기엔 아까운데 그냥 쓰자니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던 차에 인터넷에서 소파 천갈이 공방을 발견했다. 소파를 새로 사려면 100만원 가까이 들텐데 천갈이 공방에 맡기면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 새것처럼 만들 수 있다. 여기저기 튀어나온 스프링도 교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뛸 듯이 기뻤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 많아져 #불필요한 물건 버리고 나누면 #라이프스타일 바뀌고 건강해져

내친김에 집안 곳곳을 바꿔보기로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쓰지 않거나 불필요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과장해서 말하면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는 건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새해를 맞아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안 입는 옷부터 치웠다. 장 속에서 산더미 같은 옷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버릴 옷을 가려내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옷을 손에 들고 한참을 서 있다가 아내한테 지청구를 들었다. 급기야 “당신 옷도 버리지, 왜 나만 버리라는 거냐”고 아내에게 반항을 하기도 했다. (물론 1분도 못 가 꼬랑지를 내렸다.)

넷플릭스에 나오는 정리의 달인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했는데 문제는 설레지 않는 옷이나 물건이 거의 없다는 거였다. ‘이 옷이 얼마짜리인데…’ ‘이 옷은 다음에 입으면 되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다 보니 버릴 옷을 골라내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구두·운동화에 이어 캐주얼 신발에 축구화·골프화까지 쏟아져 나온다. 결국 비우고 버리는 작업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수반하는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도 여기저기에선 ‘미니멀 라이프’나 ‘비우는 삶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걸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극심한 고통이 뒤따른다. 물건 버리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눈물까지 흘릴 판이다. 오죽하면 비싼 돈을 주고 옷과 살림살이를 대신 치워주는 정리의 달인까지 불러들여야 할까. (이분들 하루 품삯이 100만원을 넘는 경우도 있다.)

서소문 포럼 2/11

서소문 포럼 2/11

온 국민이 알다시피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일단 집안 한 평 한 평이 금싸라기 땅이다. 자기 집이 아니라 전세나 월세로 살더라도 마찬가지다. 한 평이 도대체 얼마인가 생각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귀중한 공간에 불필요한 물건을 잔뜩 들여놓고 사는 건 아닌가. 집 정리를 하다 보니 구석구석에서 몇 년 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옷과 신발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30여년 전 학창 시절에 쓰던 교과서까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몇 년 동안 건드리지 않아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옛날 영화를 담은 비디오테이프에 못 쓰게 된 구형 핸드폰도 한두 개가 아니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이 이어지면서 홈 인테리어나 리모델링 업체가 바빠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데 굳이 남의 손을 빌려서 리모델링을 할 게 아니라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일 듯싶다. 비움과 정리만으로도 집안이 넓어진다. 잃어버렸던 한 평, 활용하지 못했던 한 평을 되찾는다. 대한독립 만세가 아니라 우리 가정 만세다. 저절로 힐링이 된다.

집안을 정리하고 비우다 보니 덤으로 얻은 게 또 있다. 그 넓어진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행동 패턴도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 그 쾌적함을 유지하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내다 버리고, 나눠쓰려고 노력 중이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과감히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 내놓는다. (문제는 당근마켓을 통해 내다 파는 물건보다 사들이는 중고물품이 많다는 거다) 소파 위에 널브러지거나 물건을 늘어놓던 습관도 고쳐가고 있다.

내일은 설인데 세상은 우울하다. 코로나19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살림살이는 팍팍하다. 그리운 가족을 만나는 일도 미뤄달라니 이런 세상, 참 재미없다. ‘우리 우리 설날은 내년’이란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전 세계가 힘들고 우울하지만, 이 우울증을 떨쳐내기엔 집안 정리만 한 게 없다. 돈도 들지 않는다. 넉넉잡아 일주일만 집 정리를 위해 고생하면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진다.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맑아진다. 신축년 새해엔 몸도, 마음도 비우시길-.

정제원 스포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