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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자폭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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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그것은 자폭(自爆)이었다.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있었다. 대법원장과 고법 부장판사의 적나라한 진실 공방에 많은 국민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엘리트 판사가 만든 녹취록 파문은 법조계 이면의 ‘불편한 진실’에 익숙한 기자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정리도, 감당도 힘든 ‘총체적 난국’이 펼쳐지고 있다.

‘사이토카인 폭풍’ 닮은 대법원 사태 #자기 공격해 자폭하는 시스템 오류 #곳곳 내로남불 시한폭탄으로 변해

난국에 이르는 과정은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을 떠오르게 한다. 코로나19의 치명률을 높인다는 이 증상은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 작용이 과다해져 정상 세포까지 공격하는 현상을 말한다. 세포와 세포 사이에서 신호를 전달하며 면역세포를 활성화하는 면역 단백질 사이토카인의 작동 오류가 원인이다. 과잉 생산된 백혈구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한다. 몸 전체에서 염증 반응이 일어나 여러 장기가 망가지고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바이러스를 격퇴하던 순기능이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리는 역기능으로 돌변한다. 공포영화의 반전 같은 무시무시한 현상이다.

우리 사법 시스템도 자폭에 이를 만큼 오류가 누적됐다. 법관의 양심이 이념의 잣대로 재단됐고, 사법부 독립이 입법부 발아래에 놓였다. 그 결과 양심을 잃은 판사가 독립을 저버린 대법원장에게 녹음기를 들이댔다. 헌법 질서를 무너뜨린 그를 탄핵하겠다고 앞장선 이들은 법복을 벗자마자 정치에 뛰어든 왕년의 판사들이었다. 누가 바이러스이고 누가 백혈구인지 헷갈린다. 무엇이 병이고 어떤 게 치료인가. 판사의 양심, 법관의 독립, 삼권분립의 헌법 원칙이 모두 염증의 폭풍에 휩싸였다.

서소문 포럼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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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에 침윤된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오류의 출발점이었다. 누가 봐도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명제를 사법 권력은 다 가지려 했다. 국민 앞에선 삼권분립을 얘기하고 뒤로는 정치에 기댔다. 보수·진보의 대법원이 다르지 않았다. 최상의 가치라던 재판의 독립, 판사의 양심은 사법행정과 사법개혁의 이름으로 제물로 던져졌다. 이념으로 갈린 법원 구성원들은 상대 진영의 이율배반을 탓하다가 내로남불의 늪에 빠졌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을 폭로한 녹취록은 그렇게 누적된 시스템의 오류에 기인한 잘못된 면역 반응, 사이토카인 폭풍이었다.

한국 최고의 집단지성이 이 지경일진대 다른 분야는 오죽하겠는가. 돌이켜 보면 곳곳에서 이상 면역 반응이 있었고, 자폭이 일어났다. 한국 성 평등 운동의 선구자였던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여비서 성희롱 사건도 그중 하나다. 비극이 남긴 상처는 약 7개월이 지나도 아물지 않고 있다. 진영을 지키느라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내고, 피해자의 고소를 누설하는 위선적 ‘언동’은 사건을 악화시켰다.

진보 진영과 여성계는 뒤늦게 사과의 목소리를 냈지만, 이미 사회적 신뢰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박 전 시장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판단한 이후에도 불편한 과제는 산적해 있다. 박 전 시장이 설립한 성평등도서관에 인권변호사이자 여성운동가로 전시된 고인의 기록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남길 것인지 우리 사회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정의기억연대의 후원금 유용 의혹을 제기한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도 오랜 시간 누적된 위선에 대한 면역 반응이었다. 최근 정의연의 ‘성찰과 비전위원회’는 “정부와 지자체 지원금이나 보조금을 받지 않고 국내외 시민 후원을 바탕으로 재정을 운영할 것”이라며 새 출발을 다짐했다. 그러나 30년 넘게 이어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을 예전만큼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성범죄의 친고죄 폐지를 주장한 정의당에서는 당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터지자 “왜 고소를 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피해자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피해 의원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내로남불을 의심하는 당 안팎의 목소리를 잠재우기가 쉽지 않았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 역시 비서를 해고했다가 ‘부당 해고’ 논란에 맞닥뜨렸다. 어설픈 설명은 더 강한 면역 반응을 불러왔다.

진보 성향의 신문사에선 기자 40여 명이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운전 중 폭행 의혹을 감싸는 기사를 썼다”면서 데스크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동일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교조적 신념에 갇혀 정작 조직 안의 적신호를 파악하지 못했다. 결과는 자폭에 버금가는 충돌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진보 진영 곳곳에서 묻히고 짓눌렸던 크고 작은 내로남불과 이율배반의 오류는 폭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시스템의 사소한 오류에도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대형 시한폭탄을 품게 된 것이다.

김승현 사회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