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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나 코로나 걸렸어" 한밤 마스크 안 쓴 무리가 찾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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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던 직장인 이 모(35·여성) 씨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코끝에 스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어딘가 허전함을 느낀 그는 자신의 얼굴을 황급히 더듬었다. 자신이 마스크를 안 쓰고 나온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주변엔 약국도 편의점도 보이지 않았다. '어서 집으로 되돌아가야 해' 그는 애를 썼지만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를 향해 마스크를 안 쓴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상화된 공포, 쌓인 스트레스가 꿈으로 #마스크 관련, 출입국 막히는 꿈 등 다양 #각국서 연구 결과 나오며 학술지 게재 #핀란드인 악몽의 55%가 코로나19 관련 #자다 깨다 수면 질 떨어져 더욱 '생생'

'어떡해 나는 이제 꼼짝없이 코로나에 걸렸어' 그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놀라 눈을 뜬 그는 침대 위에 있었다. '후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었던 것이다.

이씨는 "회사 동료에게 이런 꿈을 꿨다고 이야기했더니 동료가 '나도 며칠 전 비슷한 꿈을 꿨다'며 놀라더라"면서 “코로나로 악몽까지 꾸나 싶어 씁쓸했다"고 말했다.

삽화=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악몽 같은 코로나 1년'이 사람들의 꿈까지 감염시키고 있다. 마스크, 거리 두기, 감염 등 코로나19 팬데믹과 관련된 악몽을 꾼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연구 결과가 여러 나라에서 속속 나오며 국제 학술지에도 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일상화된 공포심이 잠재의식의 영역에까지 침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또 스트레스가 누적되면서 꿈의 내용은 강렬해지는 반면 수면의 질은 떨어져 악몽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에 남게 된다고 설명한다. 안젠라 드레이크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BBC에 "팬데믹 초반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이겨내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일상화된 공포, 꿈에 침투… 각국서 연구 결과 나와 

워싱턴포스트, 과학 매체 라이브 사이언스 등에 따르면 하버드 의대 심리학과의 디어드레 배렛 교수는 지난해 4개월간 미국을 포함한 세계 86개국의 남녀 2888명을 대상으로 코로나19와 꿈의 상관관계를 조사해 드리밍 저널(Journal Dreaming)에 발표했다.

배렛 교수는 "꿈은 보통 내면의 걱정과 우려가 생생한 이미지와 스토리가 있는 한 편의 드라마로 표현되는 것"이라면서 "조사 결과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꿈의 내용이 걱정과 불안이 표현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심리학 프론티어저널(Journal Frontiers in Psychology)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핀란드인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꾼 악몽의 55%가 코로나19와 관련된 것으로 나타났다. 거리 두기를 안 지키는 실수를 한다거나, 해외에 나갔다가 국경 봉쇄로 집에 되돌아가지 못하는 꿈이 대표적이었다. 드리밍 저널에 실린 논문을 보면 이탈리아에서도 796명에게 물었더니 20%가 코로나19와 관련된 악몽을 꿨다고 답했다. 캐나다에선 북미권 거주자 968명 중 37%가 코로나19 팬데믹에 관한 꿈을 꿨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국내외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SNS)에도 '코로나 악몽'을 경험했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마스크를 안 쓰고 외출해서 옷으로 코와 입을 막고 다니는 꿈을 꿨다" "식당에서 마스크를 안 쓰고 말하는 아저씨와 싸웠다" "마스크를 안 써서 사람들을 피해 숨어다녔다. 공공장소에서 벌거벗은 꿈을 꾼 것만큼이나 공포스러웠다" 등 코로나 시대에 필수가 된 마스크 착용과 관련된 꿈들이 많다. "꿈에서 코로나19에 걸려 후각을 잃었다" "가족이 코로나19에 감염돼 목숨을 잃는 꿈을 꿨다"와 같이 감염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꿈도 있었다.

코로나 상황 따라 꿈 내용도 변화…수면 질 떨어져 더 생생 

배렛 교수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변화에 따라 주로 꾸는 악몽의 내용도 달라졌다. 초기 혼란스런 상황에선 마트 진열대가 텅 빈 꿈을 많이 꿨으나, 시간이 갈수록 방역 지침이나 봉쇄와 관련된 꿈을 꾸는 경우가 잦아졌다는 설명이다. 최근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SNS에는 "백신 맞는 꿈을 꿨다"는 글들도 올라오고 있다.

최근 서울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관련 악몽을 꾼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시대 필수가 된 마스크 착용에 관한 꿈을 꾼다는 사람들이 많다. [뉴스1]

최근 서울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관련 악몽을 꾼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시대 필수가 된 마스크 착용에 관한 꿈을 꾼다는 사람들이 많다. [뉴스1]

'코로나 악몽'에는 개인이 처한 상황이 반영되기도 한다. 배렛 교수가 조사한 한 여성의 경우 10살 난 자녀가 같은 반 친구 전체를 집으로 데려와 1년간 혼자 홈스쿨링을 책임져야 하는 '악몽'을 꿨다. 이 여성은 실제로 자녀의 학교가 코로나19의 여파로 폐쇄돼 양육에 애를 먹고 있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코로나 사태 장기화의 영향이다. 수면 전문가인 닐 스탠리 박사는 텔레그래프에 "실생활의 경험이 잠재의식에 스며들어 꿈으로 나타나는 데는 3~7일 정도 걸린다"면서 "우리가 어떤 사건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 대한 더 많은 꿈을 꾸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거리 두기를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 뉴노멀이 됐다. [AFP=연합뉴스]

미국에서 거리 두기를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 뉴노멀이 됐다. [AFP=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하룻밤에 4~5번 정도 꿈을 꾸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꿈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코로나 악몽'은 기억에 생생히 남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구글 사이트에서 '생생한 꿈'에 관한 검색량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148%나 증가했다고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수면의 질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자주 깨거나 잠들기 어려운 수면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늘면서 '코로나섬니아(Coronasomnia·코로나와 불면증을 뜻하는 '인섬니아'의 조합)'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5일 이스라엘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이뤄지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5일 이스라엘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이뤄지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스탠리 박사는 "꿈을 기억하려면 꿈꾸는 도중에 깨야 가능하다. 그런데 코로나19 장기화로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커지면서 자다가 깨는 경우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꿈을 잘 기억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부정적 정서가 만연하다는 조사 결과가 2일 나왔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성인 1000명을 상대로 코로나19 확산 후 느낀 감정 변화에 대해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8%가 "걱정이나 스트레스를 이전보다 많이 느낀다"고 답했다.

걱정 일지 쓰고, 자기 전 코로나19관련 이미지 피하기  

전문가들은 수면장애를 겪는 사람들도 몇 가지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조언한다.

'걱정 일지' 작성은 악몽과 수면 방해의 근본적인 원인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수면 컨설턴트 메리앤 테일러는 "초저녁 10~15분간 종이에 고민과 생각을 적어보면, 밤에 누워 그런 생각을 덜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잠자기 15~30분 전엔 코로나19와 관련된 이미지를 보지 않는 것도 악몽 예방에 도움이 된다. 수면 의학자인 샬리니 파루티 박사는 "자기 전에 본 마지막 영상이 코로나19에 대한 것이라면 관련 꿈을 꾸게 될 확률이 높다"면서 "대신 지난 휴가 때 찍은 사진이나 재밌는 동영상을 보라"고 조언했다.

악몽을 반복적으로 꿀 경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도해 볼 수 있다. 5~10분 정도 밤에 침대에 누워 꿈의 결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훈련을 하면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가령 누군가에 쫓기는 꿈을 자주 꾼다면, 보디가드가 나타나 나를 구해준다는 식으로 결말을 상상할 경우 꿈의 내용에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해놓고, 낮이나 밤에 명상과 요가를 하는 것도 숙면에 도움이 된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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