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韓아저씨 흉내 내려다···“ '미나리' 스티븐 연이 털어논 고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왼쪽)과 주연 배우 스티븐 연.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당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왼쪽)과 주연 배우 스티븐 연.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당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미나리’는 미국 영화다. 감독과 주연배우 모두 미국 국적이다. 한국엔 ‘정이삭’으로 알려졌지만 정 감독은 미국에선 ‘리 아이작 정’으로 유명하다. 주연 남자배우 스티븐 연 역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5살 때 미국으로 이주, ‘연상엽’이라는 한국 이름이 낯설다.

그럼에도 이들의 영화 ‘미나리’는 미국 골든글로브 영화상에서 외국어 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미국 아칸소주(州)로 이주한 한국계 가족의 삶을 그리면서 대부분의 대사가 한국어라는 논리다. 미국 내에서도 논란이 일었지만 정작 정 감독과 배우 연 씨에겐 익숙한 문제다. 한국에선 미국인, 미국에선 한국계라는 경계인으로의 정체성은 평생 그들의 발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미국 내 수많은 다른 이민자들에게도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영화 '미나리' 한 장면. AP=연합뉴스

영화 '미나리' 한 장면. AP=연합뉴스

지난 1일(현지시간) 게재된 미국판 GQ 인터뷰에서 정 감독은 “원래는 한국인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다”며 “그런데 에이전트가 ‘스티븐이 그 역할에 관심이 있다더라’고 귀띔해주더라”고 캐스팅 배경을 밝혔다. 정 감독과 스티븐 연은 먼 친척 관계라고 한다. 연 씨가 정 감독의 사촌과 결혼했다. 정 감독은 처음엔 친척을 캐스팅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GQ에 “가족을 캐스팅하는 건 이상했고 서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렇게 친척 관계와 일을 연결짓는 것 자체가 꽤나 ‘한국계 미국인’ 같은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됐고, 스티븐을 캐스팅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영화에 출연하게 된 스티븐 연을 두고 미국에선 한국계뿐 아니라 이민자 사회에선 울림이 크다. 지난 3일 뉴욕타임스(NYT) 주말판이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가 게재한 연 씨의 기고문과 인터뷰 기사 첫머리. [NYT 캡처]

뉴욕타임스가 게재한 연 씨의 기고문과 인터뷰 기사 첫머리. [NYT 캡처]

이 기사를 쓴 한국계 기자인 제이 캐스피언 강 기자는 연 씨와의 인터뷰를 두고 "심리치료같았다(therapeutic)"했다고까지 표현했다.

관련기사

강 기자는 한때 소설가를 꿈꿨다고 한다.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떨치고 새로운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결국 이민자로서의 틀에 스스로를 가둔 셈이 됐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만뒀다고. 그는 이어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항상 ‘백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음을 인지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배우 연 씨 역시 같은 고민을 했음을 소개한다.

연 씨는 다섯살때 미국으로 이주한 뒤, 전형적인 한국계 이민자처럼 주말엔 교회에 다니고 학교에선 끊임없이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랐다. 그러다 인기 방송 드라마 ‘워킹 데드’에서 한국계 캐릭터를 연기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도 출연하며 연기력도 인증했다. 이번 작품은 연 씨 본인에게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 이민 1세대를 연기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직시하게 됐기 때문이다.

영화 '미나리' 포스터. [사진 판씨네마]

영화 '미나리' 포스터. [사진 판씨네마]

연 씨는 “‘미나리’를 찍으면서 솔직히 내 (한국어) 발음이 제대로 됐는지 아직도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역시 아시아계 미국인인 NYT 기자에게 “많은 사람이 ‘얘, 실제 한국 아빠는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라고 했다”며 “하지만 실제 ‘아저씨(ahjussi)’처럼 발음을 해보니 뭔가 내가 사기꾼 같았고 내 방식대로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국적인 요소는 이처럼 ‘미나리’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큰 고민을 안겨준 지점이었다. 정 감독은 GQ 인터뷰에서 “백인 관객을 위해서만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라며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내 정체성을 (백인 관객을 위해) 굳이 설명하지 말자는 것, 그게 내 의도였다”고 말했다. 연 씨는 NYT에 “사실 아무도 개의치 않는데 내가 혼자 계속해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나 싶기도 하다”며 “미국에서 항상 ‘나는 그냥 한국인이 아니야, 미국인이라고요’라고 저항하곤 한다”고 말했다.

이민자에 의해 세워진 국가 미국에서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 그 표본과 같은 정 감독과 배우 연 씨가 빚어낸 영화 ‘미나리’는 3월 한국에서 개봉한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