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소설 거장의 자전적 역작

중앙선데이

입력 2021.02.0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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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호 20면

완벽한 스파이 1·2

완벽한 스파이 1·2

완벽한 스파이 1·2
존 르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열린책들

지난해 타계 르카레의 86년작
영국 배신 이중스파이 이야기

실제 정보기관 근무 경험 살려
냉전 시대 개인의 상처 건드려

지난해 12월 12일 세상을 떠난 영국 스파이 문학의 거장 존 르카레(1931~2020년)의 작품에는 현장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영국 외교부 외교관과 해외정보부(MI6) 요원으로 일한 내부자이기 때문이다. 본명이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월인 르카레는 방첩 부서와 주서독 영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했다. 정보 세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칠 정도로 세밀한 배경이다.

이 소설은 작가로서 원숙미가 넘치던 1986년 작품이다. 스파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철과 피의 거친 냄새가 아니라 인간의 살 냄새가 묻어난다. 쓴맛이 강한 현실을 상상이라는 당의정으로 포장했다. 긴장감 넘치고 온갖 음모가 판치는 상황 속에서도 위트를 잊지 않는 르카레 방식의 서술도 여전하다.

구성도 장르의 진부함에서 벗어났다. 영국 정보 요원인 매그너스 핌은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홀연히 사라진다. 놀란 동료들은 필사적으로 그의 행방을 추적했지만 찾은 것은 그가 아니고 놀랍고 불편한 진실이었다. 핌은 오랫동안 공산 진영인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일한 이중스파이였음이 드러났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핌이 만난 사람들, 겪은 일과 함께 지나온 ‘마음의 행로’를 되밟아간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가 왜 조국을 배신했는지를 설명한다. 권위적인 악당으로 그려진 아버지 릭과의 관계, 정보기관에 입문한 경위, 오랜 친구인 체코슬로바키아 스파이 악셀과의 만남 등이 그려진다. 핌은 이중스파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자아들이 서로 갈등하는 것을 느낀다. 신분을 철저히 위장해야 했던 세월은 사실 자신의 자아와 영혼을 희생하는 과정이었다.

이 작품은 스파이 소설치고는 두 가지 점에서 독특하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 하나이고,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은 자전적 내용이 들어갔다는 점이 둘이다.

냉전 시대를 풍미했던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카레의 생전 모습. 지난해 말 타계했다. [AP=연합뉴스]

냉전 시대를 풍미했던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카레의 생전 모습. 지난해 말 타계했다. [AP=연합뉴스]

소설의 주인공 핌의 아버지 릭의 캐릭터는 르카레의 부친 로니와 빼 박았다. 과시적 소비에 사기꾼 경향도 농후하다. 가난하게 성장했지만, 아들들은 사립학교에 보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했다. 르카레는 아버지의 열성 때문에 옥스퍼드대에서 현대언어를 전공하고 우등 졸업할 수 있었지만 자아를 억압하고 신분을 재생산하는 당시 교육제도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작품 속에선 주인공 핌이 이중스파이가 되는 요인의 하나로 그려졌지만, 르카레 본인은 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다. 자전적인 소설이 아니라, 자전적인 내용에 상상을 결합했다.

이중스파이 이야기는 르카레의 작품에서 단골 소재다. 73년 펴낸 출세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는 동독 정보부에 침투하는 영국 요원의 이야기다. 이듬해 내놓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는 영국 비밀정보부를 의미하는 서커스의 고위직에 오른 소련 이중스파이를 색출하는 과정을 그렸다.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용 때문에 모두 영화로 만들어졌고 흥행도 성공했다.

르카레의 작품이 묘하게도 이중스파이를 단골로 그린 데는 배경이 있다. 냉전 시대는 사실 이중스파이의 전성기였기 때문이다. 40년대 후반 미국 핵 자료를 넘겨 소련의 핵 보유를 도운 것도 내부 스파이들이었다. 6·25전쟁 기간 영국 해외정보기관엔 이중스파이가 득실거렸다. 케임브리지대 출신 정보 요원으로 소련에 기밀을 빼돌린 5명의 이중스파이를 가리키는 ‘케임브리지 파이브’는 배신과 반역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 한 명인 킴 필비는 MI6 수장 물망에도 오른 거물이었다.

이들을 통해 ‘미국이 핵을 쓰지 않을 것이고, 만주로 진격하지 않으면서 한반도에서 제한적인 전쟁만 벌일 것’임을 간파한 소련과 중국은 확전의 염려 없이 맘껏 실리를 취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숨진 조지 블레이크도 서울의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다 6·25 전쟁 중 포로가 된 뒤 전향해 이중스파이가 됐다. 케임브리지 파이브와 블레이크는 스파이 문학에 영감을 줬다.

이중스파이가 현실이 되면서 소설에서 이를 다루기가 힘들어졌다. 영국 정보 세계의 상처를 건드리는 데다, 현실이 소설만큼 흥미진진해지면서 자칫 진부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 작품이다. 스파이 세계와 스파이 문학 세계의 고민을 동시에 담은 셈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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