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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분노사회, 하나님의 콧구멍이 긴 이유를 생각해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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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하이패밀리 대표

귀도 눈도 둘이다. 하나일 것 같은 코도 두 개다. 겉으로는 하나지만 안으로는 둘이다. 두 개의 콧구멍은 3~4시간마다 임무를 교대한다. 숨을 쉴 때나 냄새를 맡을 때도 번갈아 임무를 수행한다. 비주기(鼻週期)라 한다. 자율신경계가 이를 조절한다. 화가 난다. 눈에는 불이 켜진다. 얼굴은 붉어진다. 숨은 가팔라진다. 몸이 뻣뻣해진다. 온몸이 분노를 표현한다. 하지만 분노의 상징은 단연코 코다. 화가 나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거린다. 코에서 콧김이 뿜어져 나온다.

분노는 장애 아닌 고쳐야할 습관 #화가 나면 에스키모인처럼 걷자

추운 겨울이라 하면서도 덥다. 열불 날 일이 많아서다. 계속되는 코로나19 감염 소식에 우울이 일상이 됐다. 경제 상황은 한숨을 넘어 불면증으로 이어진다. 정치 기사가 신경을 자극한다. 세상사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든다. 부글부글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희망차야 할 새해 벽두 용암이 분출하듯 터진 ‘정인이 사건’이 특히 그렇다. 곳곳에서 서로 죽이라고 소리친다. 마스크로 감춰진 얼굴인데도 언제든 화를 낼 준비가 된 표정들이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는 ‘분노사회’가 됐을까. 콧구멍이 짧아서다.

성경에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잠언14:17)는 구절이 있다. 직역하면 ‘콧구멍이 짧은 자는 어리석은 일을 (지속해서) 행한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은 ‘코가 긴’ 분으로 묘사된다. 성경 곳곳에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콧구멍이 길다’는 히브리어의 번역이다. 콧구멍이 긴 만큼 화를 내뿜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의 콧구멍이 길어야 할 이유다.

우울·짜증·분노가 스트레스와 뒤엉켜 폭발한다. 정신과 용어로 ‘분노 발작’이라 한다. 잠깐이지만 미치광이가 된다. 심리학에서는 ‘분노조절 장애’라 부른다. 틀렸다. 장애가 아니라 습관이다. 장애는 고치기 어렵다. 선천적일 때가 많다. 고혈압·당뇨·암을 과거엔 성인병이라 불렀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걸리는 병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다면 소아 당뇨와 소아암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생활습관병이 맞다. 분노가 그렇다. 습관이다.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분노는 술에 취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술에서 깨어나면 후회하듯 분노도 마찬가지다. 분노가 가라앉고 나면 반드시 후회한다. 문제는 그 일로 자신이 죽어간다는 점이다. 벌을 보라. 성난 벌이 사람을 쏜다. 쏘인 사람은 약간 아프고 말지만, 벌은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왜 모를까.

성경은 ‘화내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고 성미 급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마라’고 경고한다. 분노에 대한 특이한 처방전이다. 이유가 있다. ‘고약한 성미는 전염성이 강하니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라’(잠언 22:24~25)고 가르친다. 분노가 대물림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에스키모인은 화가 나면 무작정 걷는다. 아무 말 없이 걷는다. 화가 풀릴 때까지 얼음 평원을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또 걸어서 화가 다 풀리면 그때 비로소 멈춰 선다. 되돌아 다시 걷는다.

돌아서는 길은 뉘우침과 이해와 용서의 길이 된다. 그 먼 길을 되돌아오면서 먼 거리만큼 화를 냈던 바보 같은 자신을 얼마나 꾸짖고 또 꾸짖었을까. 그들에게 걷기는 콧구멍을 길게 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걷기는 화를 제어하는 자율신경계를 강화한다. 러닝머신이나 도심 속 도보보다 공원이나 숲속에서 하는 자연 걷기가 제격이다. 10분을 걸으면 현재가 보인다. ‘새겨봄’이다. 20분을 걸으면 과거가 보이며 묵은 마음의 때가 사라진다. ‘돌아봄’이다. 30분을 걸을 때쯤이면 나의 미래가 보인다. ‘바라봄’이다. 봄이 오고 있다. 걷고 걸어 그 누구보다 먼저 봄을 맞이하자.

송길원 청란교회 담임목사, 하이패밀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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