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갈림길에 선 미국 민주주의

중앙일보

입력 2021.02.0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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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미국 하원의 공화당 원내대표인 케빈 매카시는 지난달 28일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 리조트에 날아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만났다. 하원이 트럼프 탄핵안을 통과시켜 상원 심판을 앞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트럼프가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지지자들을 선동해 지난달 6일 의회 폭동 사태를 일으켜 탄핵 위기에 처했음에도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트럼프가 공화당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며 그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공화당, 선거 위해 협력 거부 예상
바이든이 성공 사례 제시 못하면
미국 민주주의 회복 힘들어져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트럼프 탄핵안이 지난달 26일 상원으로 넘어오자 “트럼프는 이미 퇴임했기 때문에 탄핵 심판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탄핵 심판을 무산시키려 했다. 결국 합헌 55대 위헌 45로 위헌 주장은 거부됐지만, 공화당 의원 50명 중 합헌에 찬성한 사람은 5명에 그쳤다. 상원에서 탄핵 결정을 내리려면 공화당 의원 17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므로 트럼프 탄핵은 사실상 힘들어졌다.

트럼프의 편 가르기 정치로 인해 대선뿐 아니라 상·하원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음에도 공화당은 여전히 트럼프에 집착한다. 트럼프가 열성 지지층과 넉넉한 정치자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최다 득표 역대 2위에 해당하는 7422만 표를 얻었다. 의회 폭동 사태 이후에도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여전하다. 여론조사기관 유거브의 여론조사 결과, 공화당 지지층의 58%가 트럼프가 의회 폭동에 책임이 없다고 했으며, 탄핵에 반대한다는 응답도 79%에 달했다.

서소문포럼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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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또 ‘세이브 아메리카’ 정치활동위원회(PAC)를 통해 7000만 달러(약 774억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데 이 돈을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실력자로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전했다.

흑인 노예제를 폐지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공화당은 트럼프가 좌지우지하는 극우 정당이 될 위기에 처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공화당 지도부가 트럼프나 새러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걸러내는 문지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영합하며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인종 차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으로 백인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나 흑인·히스패닉·아시아계 등 유색 인종의 외면을 받았다. 레비츠키 교수 등에 따르면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개신교 집단은 200년 가까이 미국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우월한 지위를 누렸으나 이제 다수의 지위를 잃었고 공화당 안에 틀어박혀 있다. 이들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며 공격한다.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구호는 이들에게 ‘진정한 미국인’인 자신들이 다시 우월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취임사에서 통합과 민주주의를 11차례 언급하며 국민 화합을 호소했다. 문제는 공화당이 바이든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다는 점이다. 공화당 의원 대부분은 바이든의 대선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트럼프 탄핵에 반대한다.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와의 관계를 끊을 경우 내년 중간선거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반발로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트럼프가 탄핵을 피하고 내년 선거에서 영향력을 입증한다면 2024년 대선에 재출마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민주주의에는 재앙일 수 있다.

이를 피하려면 바이든이 미국민들에게 구체적인 성공 사례를 보여줘야 한다. 공화당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바이든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공화당은 2007~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집권한 버락 오바마 정부와의 타협을 거부해 경제 회복을 더디게 한 뒤 2010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했다. 많은 민주당 지지자는 오바마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공화당과의 협력에 연연하지 말고 개혁 정책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이든이 공화당의 방해에도 코로나19 백신과 부양책으로 미국 경제를 침체의 수렁에서 건져낸다면 미국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다. 그러나 공화당 반대에 부딪혀 바이든이 제대로 된 성공 사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바이든은 미국 민주주의의 마지막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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