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위안부 판결 후폭풍
한국에서 외교가 말만큼 중시되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4강에 둘러싸인 분단국이면서도, 대외 문제를 국제 관점보다 국내 관점으로 재단하는 일이 다반사다.
징용 판결은 한·일협정으로 문제 해결됐다는 정부 입장과 배치 #위안부 판결은 국가 면제 인정하는 국제 관습법과 달라 #‘피해자 한국’이 합의 위반 프레임에 걸려 국제적 체면 손상 #정부는 국제적 흐름 따르는 유연성 추구해 타개책 내놓아야
사법부도 이런 기류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최근 법원은 외교 사안이 관련된 소송에서 수차례 획기적인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법과 양심에 따라 그렇게 판단했겠지만, 그 결과는 한국 외교와 국제 위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대법원 민사1부는 2012년 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부인한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징용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한국 정부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혁신적인 판결이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8년 10월 재상고심에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 민사1부의 판결이 최종 확인된 셈이다.
일본은 1965년 청구권협정 위반이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국 정부는 협정과 판결 사이에 낀 처지가 됐다. 피해자인 한국이 약속 위반으로 수세에 몰린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정부는 그런 인식에 서지 않고, 삼권분립과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판결 편에 확실히 서버렸다. 여기서부터 일이 어려워졌다. 수세에서 빠져나오려면 정부가 협정과 판결 사이에 곤혹스러운 입장이라는 인식에 섰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과 협의로 문제를 풀 입지가 생긴다. 그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한·일 협의는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법원 판결, 국제사회 주류 흐름에 어긋나
일본은 1965년 협정의 분쟁 해결 절차인 양자 협의와 중재위원회 회부를 차례로 제안했다. 한국은 이를 거부하고 일련의 해법을 내놓았으나, 일본은 대법원의 판결 이행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이유로 모두 거부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난제가 생겼다. 서울지법은 지난달 8일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반인도적 범죄라는 이유로 일본의 국가 면제는 부인됐다. 인권의 새 지평을 여는 판결일 수도 있지만 국제 관습법에 대한 도전적 문제 제기이기도 했다. 정부에는 또 수세에 몰릴 소재가 생긴 셈이다. 정부가 징용 판결 이후 법원 편에 확실히 선 일이 의도치 않게 유사한 혁신적 판결이 나오기 좋은 분위기를 조성한 점도 있다.
일본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고 한국 정부의 시정을 요구했다. 정부는 판결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의 언급으로 곤혹스럽다고 했다. 징용 판결 때와는 다른 심사였다.
대법원 민사1부와 서울지법의 판결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반인도적 범죄와 국가 면제에 대한 엄정한 판단 등의 측면에서 기념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판결이 현재 국제사회의 주류적 흐름과 크게 다르다는 데 있다.
만일 판결이 국제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정부도 일본의 국제법 위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사안을 중재위원회나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갈 생각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딱할 정도로 아무 반박을 못 할 뿐 아니라 핵심 쟁점을 회피하고 있다. 정부가 국제법 위반 문제에 대해 판결문에 있는 논거도 원용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먼 미래에는 판결의 논점이 국제적 주류 견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국이 시대를 앞서간 법원의 판결을 안고 국제적 흐름을 거스르는 부담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문제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선은 상황의 추가 악화를 막아야 한다.
일본의 국가 면제가 부인됐으니 이제부터 일본 정부나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국가 면제 부인 판결이 이어지면 정부는 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법원이 거기까지 배려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계 여러 나라의 법원이 외교 사안에 대해 사법 자제를 하거나 행정부의 의견을 경청하고, 국가 면제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또 다른 판사들이나 대법원도 국가 면제를 부인할지도 궁금하다.
이 대목에서 하나의 상상을 해 본다. 향후 유사한 소송에서 국가 면제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만일 대법원이 국가 면제를 인정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더는 법원발 난제 없어야
한편 강제 집행이 미루어져야 해결을 위한 시공간이 생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대통령도 강제 집행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정부도 노력하고 민간에서도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상황 관리 다음에는 문제를 푸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무래도 정부가 국제적 흐름을 따르는 유연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법원의 판결을 끌어안았기 때문에 운신의 여지가 적다. 다만 위안부 판결 이후 곤혹스럽다는 인식을 표명했으므로 이런 기류가 정부의 대처에 미칠 영향은 주목해 보고자 한다.
정부가 나서서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면 초당적 현인 회의를 구성해 해법을 의뢰하는 것이 출구일 수 있다는 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법원은 기념비적 판결을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무대에 남은 한국 외교는 판결의 충격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한국 외교는 이어지는 난제와 일본의 조직적 대응 앞에 몰리고 있다. 피해자인 우리가 합의 위반 프레임에 걸려 국제적 체면 손상을 겪고, 일본의 질타 앞에 제대로 논박도 못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롭다. 정부가 타개책을 내놓기 바란다. 그리고 이제 더는 법원발 난제는 없었으면 한다.
징용·위안부 판결과 깊어지는 한·일 갈등
대법원 민사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2012년 5월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였다가 1·2심에서 패소한 사안을 파기 환송하고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징용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정부의 기존 입장과 전혀 다른 판결이었다. 일본은 협정 위반이라고 하며 한국 정부의 해결을 요구했다.
파기 환송에 따라 고등법원은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고, 일본 기업이 상고해 사건이 다시 대법원에 올라갔다. 대법원 전원 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2018년10월 징용 문제 재상고심에서 원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대법원 민사1부의 판결은 최종적으로 확정됐다.
이후 일본 기업이 배상에 응하지 않자 원고들은 해당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조치를 했고, 지금은 이를 현금화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현금화가 실현되면 대응 조치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양측 간에는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고 있으며 양국 사이의 전반적인 협력 기반은 잠식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지법 제34민사부(주심 김정곤 판사)는 지난달 8일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 정부에 피해자 1인당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국제법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국가 면제(일국은 타국의 국내 재판권에 따르지 않는다)를 부인한 점에서 괄목할만한 판결이었다. 판결은 국가 면제가 위안부 같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애초 국가 면제를 주장하며 위안부 소송에 응하지 않았다. 판결 후에도 아무런 소송 절차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판결은 1심으로 확정됐다.
향후 원고들이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강제집행을 하려고 할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이 강한 대응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한·일 관계는 더 나락으로 떨어질 소지가 크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