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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문 대통령과 메르켈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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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코로나 위기를 겪으면서 각국 지도자들이 밑천을 훤히 드러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손바닥 크기의 마스크를 쓰고 우왕좌왕하다 조롱 대상이 됐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방역을 잘해 국민 60% 이상이 지지한다. 유럽 지도자들은 내세울 게 별로 없다. 방역이 시원찮고, 경제도 엉망이다. 독일은 코로나 확진자가 매일 2만 명 안팎, 누적 220만 명을 넘을 정도로 심각하다. 지난해 성장률도 마이너스 6%에 그쳤다. 그런데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국민 70%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다.

메르켈, 정치 내려놓고 국민 걱정 #코로나 심각해도 지지율 70% #문 대통령, 유세하듯 K방역 자랑 #코로나마저 정치적 이용 느낌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확진자가 141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가운데 뉴질랜드·호주에 이어 세 번째로 적다. 지난해 성장률은 마이너스 1%다. OECD에서 가장 선방했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40%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결정적 장면을 살펴보자.

#1 (지난해 봄, 코로나 1차 대유행). 메르켈 총리의 3월 대국민 연설. “독일은 2차대전 이후 가장 큰 위기다. 최악의 경우 인구의 60~70%가 코로나에 감염될 수 있다. 백신과 치료제는 아직 나온 게 없다. 바이러스 확산을 늦추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다. 정부 방침에 잘 따라 달라.” 이어 “이동 제한이 민주국가에서 얼마나 힘든 건지 잘 안다”고 덧붙였다. 옛 동독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이동 제한의 아픔을 뼈저리게 경험한 그다. 문 대통령의 5월 취임 3주년 특별연설. “K방역은 세계의 표준이 됐다.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과 국민적 자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국민 여러분이 정말 자랑스럽다.”

메르켈 총리는 솔직하고 담백한 화법이다. 코로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며 국민의 협조를 구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메르켈은 정확한 정보를 갖고 국민과 소통한다”고 평가했다. 낯간지러운 자화자찬은 없다. 왠지 신뢰감을 준다. 표 계산하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국민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이다. 코로나 위기에 더욱 빛나는 무티(엄마) 리더십이다.

문 대통령은 잘한 건 화려하게 포장하는 화법이다. 잘못한 건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옛날 스타일이다. 요새는 인터넷이 발달해 국민이 정부의 잘잘못을 꿰뚫고 있다. 그런 국민에게 ‘정부가 잘했다’고 해봐야 역효과만 난다. 이런 화법은 세상이 잘 돌아갈 때는 그럭저럭 넘어간다. 위기 때는 금세 질린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국민의 불안과 불신에 진심으로 답한다는 느낌이 없다. 모든 걸 정치화하더니 코로나마저 정치적 셈법에 따라 이용한다는 인상을 준다. ‘정부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데, 국민이 잘 따라줘 감사하다’와 ‘정부가 너무너무 잘했고, 국민도 잘 따라줘 감사하다’ 중에 어느 게 더 국민 마음에 와닿겠는가. 메르켈 총리가 한 수 위다.

#2 (지난해 가을, 예산안 연설). 12월 국회 예산안 의결을 앞둔 메르켈 총리의 연설.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예산을 엄청 투입했다. 국가채무가 많이 늘었다. 이런 식의 재정 지원을 끝없이 지속할 수는 없다. 2023년부터는 국가채무를 갚아 나가야 한다. 향후 수년간 예산정책과 관련해 엄청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10월 문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 “뼈를 깎는 지출 구조조정을 병행해 재정건전성을 지켜나가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

메르켈 총리는 코로나로 인해 재정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소상히 설명했다. 당장 급하니까 돈을 쓰긴 하지만, 앞으로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갚아야 할 빚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빚을 갚기 시작하는 시기도 2023년으로 못 박았다. 구체성과 진정성을 띤다. 재정에 문제가 생긴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 1만1000자에 재정 걱정은 ‘뼈를 깎는 지출 구조조정…’ 딱 한 줄 들어가 있다.

#3 (2021년 신년사). 메르켈 총리 신년사. “15년 재임 동안 2020년이 가장 어려웠던 해다.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팬데믹을 헤쳐나가고 있다. 코로나가 야기한 도전은 계속 엄청난 상태로 남을 것이다. 이 혹독한 겨울은 아직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지만, 새해는 절망이 끝나리란 희망으로 가득하다.” 문 대통령 신년사. “OECD에서 손꼽히는 방역 모범국가가 됐다. 드디어 어두운 터널의 끝이 보인다. 지난해는 위기에 강한 나라, 대한민국을 재발견한 해였다.”

메르켈 총리는 신년사에서 코로나에 집중했다. 국민 건강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다른 현안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코로나 극복이 그의 마지막(9월 퇴임 예정)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주목도를 높이고, 강렬한 의지를 드러낸다. 역시 고수다. 장기 집권하는 이유가 다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런 모습이 메르켈의 인기 비결”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 신년사는 지난해 연설의 연장선이다. ‘K 방역 잘했고, 국민이 잘 따라줬고, 경제도 선방했고…’ 식상한 레토릭에 감동이 없다. 다 내려놓고 국민 건강만 걱정하는 듯한 메르켈 총리. 선거 유세를 하는 듯한 문 대통령. 지지율 70%와 40%의 격차는 이런 데서 생기는 게 아닐까.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