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미국 2030 뒤흔든 할배 샌더스

중앙일보

입력 2021.02.02 00:34

업데이트 2021.02.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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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분명 튀는 차림새였다. 투박한 아웃도어 점퍼, 검은색 정장 바지, 낡은 갈색 구두, 그리고 코바늘을 떠서 만든 큼지막한 털장갑. 왠지 심사가 편치 않아 보이는 얼굴에 다리를 꼰 채 혼자 앉은 모습까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의 ‘신 스틸러’로 떠오른 버니 샌더스(80) 상원 의원(버몬트주) 얘기다.

샌더스 밈, 굿즈 완판에 기부로 진화
디지털 세대, 서민정치 노정객 소환
우린 2030과 공명할 정치인 있나

사실 지난 1월 20일(현지시간) 미국 CNN을 통해 본 46대 대통령 취임식은 취재진 카메라가 잡아낸 샌더스 의원의 ‘할배 패션’만 뺀다면 왜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오스카 시상식에 버금가는 정치 이벤트인지 실감케 한 화려한 무대였다.

현지시간 오전 11시15분으로 잡힌 취임식은 시작 40분 전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가족과 바이든 대통령 가족이 나타나면서 분위기가 달궈지기 시작했다. 이후 42대 빌 클린턴, 43대 조지 W. 부시, 44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45대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부부에 이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부부,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경호원의 절도 있는 안내에 따라 발코니에 등장하면서 절정을 이뤘다. 금박 비둘기 브로치에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 차림의 가수 레이디 가가도, 모자부터 발끝까지 순백의 샤넬 패션을 연출한 가수 제니퍼 로페즈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취임식 후 소셜미디어를 도배한 건 웅크린 채 말없이 앉은 괴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샌더스 의원이었다.

버니 샌더스 미 상원 의원이 1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장에 앉아있다. [AFP=연합뉴스]

버니 샌더스 미 상원 의원이 1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장에 앉아있다. [AFP=연합뉴스]

취임식 직후 불기 시작한 ‘샌더스 밈(meme, 인터넷 따라 하기)’ 열풍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사람들은 ‘다리 꼬고 앉은 샌더스’ 이미지를 활용한 각종 ‘짤’(합성 사진)을 명화 ‘최후의 만찬’에, 유명 시트콤 ‘섹스 앤드 더 시티’에, 체스 소재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 한 장면에 삽입하고 즐거워한다. 정작 샌더스 의원의 반응은 쿨하다. 한 방송 인터뷰에서 “스타가 됐는데 밈 사진이 유행될 줄 알았느냐”는 물음에 “전혀 아니다. 그저 따뜻하게 있으면서 진행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려 했을 뿐”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건 ‘샌더스 놀이’가 소비되는 방식이다. 한번 즐기고 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산적인 메커니즘을 만들어 진화하고 있다. 샌더스 의원의 사진을 박은 티셔츠와 스티커 등 각종 굿즈가 완판되면서 180만달러(약 20억원)의 판매수익을 올렸는데, 이 돈은 모두 버몬트주 자선단체에 기부된다고 한다. 샌더스 의원 지지자가 친환경 실로 짜 선물했던 털장갑은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고 수익금 일부를 역시 지역 자선단체 기부금으로 보내기로 했다. “미국인들이 샌더스의 털장갑에 하나로 뭉쳤다”는 미국 한 매체의 평가가 나올 정도다.

특히 주목되는 건 샌더스 현상을 주도하는 이들이 디지털에 친숙한 MZ세대(1980년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라는 점이다. 올해로 80세인 ‘할배 샌더스’가 역설적으로 2030세대에 공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제·사회적 분열을 겪으며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누리꾼들이 샌더스의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에 정치인과 정치체제에 대한 반감을 투영한 것”이라는 미 워싱턴포스트의 분석이 눈길을 끈다. 코로나 양극화 문제를 기성 정치가 해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MZ세대가 대안적 출구로 샌더스를 불러내 소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샌더스 의원은 2016년, 2020년 미 대선에 출마했다 주류 정치의 벽을 못 넘고 중간에 접긴 했지만 오래전부터 ‘소득불평등 해소’를 슬로건으로 내걸며 진정성 있는 정치를 주창하는 이력을 걸어 왔다. 서민 정치 한 길을 걸어온 노(老)정객에 대한 청년층의 헌정이 밈이라는 문화현상으로 화답한 셈이다.

샌더스 현상에 눈길이 가는 건 씁쓸한 우리네 풍경과 대비되는 듯해서다. 대한민국 2030세대에게도 불평등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긴 2030세대는 영혼까지 탈탈 털어 끌어모은 빚으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몰빵’ 하고 있다.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만나는 2030세대,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2030세대의 스마트폰에는 주식거래창이 떠 있다. 남들은 다 재산 늘리는데 자기만 벼락거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에 내몰려서였을 것이다.

세상사 시큰둥하던 미국 MZ세대에 할배 샌더스는 새삼 연대의 가치를 일깨웠다. 취임식 불과 2주 전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난입으로 “민주주의가 유린당했다”고 했던 미국을 뭉치게도 하고 있다. 연대와 상생, 민주주의를 말없이 역설한 그런 정치인, 우리 정치에서 보는 건 어려운 일일까.

김형구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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