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클릭 한번에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만나는 세상

중앙일보

입력 2021.02.01 13:00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68)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그린 화가는 누구지?” 담임선생님이 질문을 던졌다.

초등학교 6학년 미술 시간이었다. 미술 교과서는 여느 교과와는 달리 크기도 크고 선명한 도판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래선지 신학기가 되면 지도가 들어있던 사회과 부도와 함께 제일 먼저 손이 갔다. 거기엔 유난히 팔이 기다란 소년(내 눈엔 청년으로 보였지만) 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폴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이다. 내 인생의 소위 ‘명화’와 첫 화가는 피카소도. 반 고흐도 아닌 폴 세잔(1839~1906)이었다. 물론 그때는 세잔이 어떤 화가인지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알 턱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일본미술관 여행에서 만난 나카무라 키스해링 미술관, 야마나시현 고부치자와 소재. 아이패드7. [그림 홍미옥]

일본미술관 여행에서 만난 나카무라 키스해링 미술관, 야마나시현 고부치자와 소재. 아이패드7. [그림 홍미옥]

도도한 미술관의 친절한 변신

명성만큼이나 그 도도함이 하늘을 찔렀던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은 요즘 변신을 꾀하는 중이다. 그동안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예약한 미술관 티켓을 들고도 긴 줄을 서야만 했다. 가끔은 친절하지 않은 직원의 거들먹거림도 참아내야 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유명한 미술관들이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한 건 당연히 코로나19 때문이다. 폐허 전문 화가라고도 불리는 19세기 프랑스화가 위베르 로베르(1733~1808)는 자연재해로 폐허가 된 루브르미술관을 상상으로 그렸다. 비록 그림이지만 세계 최고의 루브르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 상상만으로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2021년 오늘, 큰비나 홍수, 태풍, 지진이 아니고도 단시간에 미술관을 숨죽이게 한 코로나의 괴력은 놀랍기만 했다. 덕분(?)에 안방에서 소문난 명화와 새로운 전시를 볼 수 있게 된 건 더 아이러니하다. 세상이 멈추니 세상의 미술이 안방으로 찾아온 셈이다.

위베르 로베르 '폐허가 된 루브르박물관의 대회랑'.1796년, oil on canvas, 114x146cm, 루브르박물관.

위베르 로베르 '폐허가 된 루브르박물관의 대회랑'.1796년, oil on canvas, 114x146cm, 루브르박물관.

이젠 누구나 미술애호가가 되는 세상

옛날 미술 교과서부터 벽돌처럼 두툼한 미술사까지 도처에 미술을 전파하는 책은 널리고 널려있다. 하지만 어쩌다가 두어 페이지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 어려운 미술책을 접할 때면 난감하다. 당장 먹고 살 문제도 아닌 ‘미술’을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건 영 아니다. 암만해도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요즘, 아니 한참 전부터 출판계엔 쉽고 재밌고 가까운 미술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에 등극함은 물론이고 입소문을 타고 롱런하는 책도 많다. 이젠 평범한 일반인도 미술을 말하고 읽고 비평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때론 글 한 줄, 책 한 장 혹은 그림 한 점에도 인생은 목적지를 비껴가기도, 되돌아가기도 한다. 우연히『일본으로 떠나는 서양미술기행』 (노유니아, 미래의 창)이란 책을 보게 되었다. 대단히 저명한 석학이 지은 것도 그렇다고 서점계를 휩쓴 베스트셀러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어릴 적 나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만나게 해준 은인의 책이 되었다. 지금처럼 코로나도 한·일 관계도 문제가 되지 않던 때여서 책 속의 미술관을 찾아가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야 멋도 모르고 그림도 보고 아는 화가의 이름이 나오면 아는 척도 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만족했다. 무슨 무슨 미술 학파를 굳이 알 필요도 없고,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도 않았다. 미술에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즐기는 사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 같다. 당연하게도 골치 아플 것만 같던 미술의 기본도 알고 싶어졌다. 최연욱 작가의 『나의 첫 미술 공부』 (메이트북스)는 그런 면에서 추천하고픈 책이다.

아트페어·비엔날레 등 수많은 전시 용어는 물론이오, 그림 액자를 보는 방법까지 어찌 보면 아주 기본 중의 기본 이론이 들어있다. 나처럼 그 기본을 모르는 일반인 미술애호가도 분명 많으리라. 이 나이에 누가 시켰다면, 혹은 간단한 자격시험이라도 본다면 부담이 됐을 그런 것이 이토록 재미있게 다가오는 건 무엇일까? 미술은 공부하지 말고 즐겨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우습지만 공부하지 말라는 말이 고맙기까지 하다.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만나다

폴 세잔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1888~1890년, oil on canvas, 79.5x64cm, 스위스 뷔를레 미술관.

폴 세잔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1888~1890년, oil on canvas, 79.5x64cm, 스위스 뷔를레 미술관.

교과서에서 만난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을 만난 건 그로부터 40여 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사실 빨간 조끼의 저 그림인지 비슷한 다른 그림인지는 확실치 않다. 단 하나 분명한 건 폴 세잔의 작품이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인연이었을까? 어린 소녀였던 난 이미 중년인데 빨간 조끼의 소년은 여전하다. 예전엔 분명히 청년으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반박 불가 어린 소년이다. 팔이 참 길다. 그리고 뛸 듯이 반가웠다.

이제 미술은 특정한 전문가나 특수 분야의 사람만 즐기고 비평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까짓거 무슨 무슨 이론이야 모르면 어떠한가, 내가 좋으면 된 거다. 잠깐 시간을 내보면 도처에 온갖 미술 정보와 전시가 널려있다. 세계의 유수한 미술관마저 문을 활짝 열었으니 더욱 그렇다. 손가락 클릭 한 번에 알타미라동굴의 코뿔소부터 키스 해링의 강아지까지 친절하게 달려오는 세상이다. 혹시 어릴 적 궁금했던 그림이나 화가가 있다면 당장 서점이나 온라인 속 미술관으로 달려 가보자. 그곳엔 오래전 우리 맘을 설레게 했던 그림 속 주인공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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