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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공동추모 獨·이스라엘, 그 뒤엔 지도자 70년 사과와 보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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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유엔총회, 국제홀로코스트기념일로 #1월27일 이스라엘·독일 대사관 공동 추모 #96년 독일 헤어초크 대통령이 첫 제안 #독일, 서독 시절부터 홀로코스트 사과·배상 #51년 서독 초대 총리 인정 발언으로 시작 #52년 이래 피해자에 740억 유로 보상 #감정 골 깊어 65년에야 외교관계 수립 #독 외교부, “외교, 홀로코스트 책임서 시작” #라우 대통령, 독일인의 이름으로 용서 구해 #메르켈, “역사적 책임은 독일의 존재 이유”

지난주 주한이스라엘 대사관에서 1월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 행사를 주한 이스라엘과 독일 대사관이 공동으로 연다며 참석 여부를 묻는 전화와 이메일이 왔다.

“유엔은 2005년에 유엔총회결의안을 통해 매년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주한이스라엘대사관, 주한독일대사관, 주한독일문화원은 온라인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식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놀라운 초청장이었다. 2개국의 3개 기관이 함께 주최하는 행사라니. 더욱 놀라운 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피해자의 주류인 유대인을 대표하는 이스라엘과 가해자인 독일 제3제국이 탈나치화를 거쳐 새롭게 탄생한 독일이 공동으로 연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이 군국주의자들이 태평양 전쟁에서 벌인 전쟁범죄의 희생자를 함께 추모하고 일본이 반성과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행사를 여는 격이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념일인 지난 27일 오스트리아 빈의 국회의사당 벽에 '우리는 기억한다(WE Remember)라는 구호를 비추고 있다. 반인류 범죄인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짖지 말자는 다짐이다. AP=연합뉴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념일인 지난 27일 오스트리아 빈의 국회의사당 벽에 '우리는 기억한다(WE Remember)라는 구호를 비추고 있다. 반인류 범죄인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짖지 말자는 다짐이다. AP=연합뉴스

유엔총회 결의로 탄생한 홀로코스트 추모일
연유를 알아봤다. 우선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은 1933~1945년 나치 박해로 학살당한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날이다. 2005년 11월 1일 유엔총회 결의 60/7(제60차 유엔총회 제7호)로 제정되면서 국제적인 추모일이 됐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지금의 폴란드 남쪽 아우슈비츠(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에 있는 나치 수용소를 해방시킨 날에 맞췄다. 유엔총회는 2005년 1월 24일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을 하루 앞두고 특별총회를 개최한 데 이어 이해 정기총회에서 국제 추모일을 결의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뿐 아니라 폴란드인, 소련 민간인과 전쟁 포로, 집시(로마로 부름), 장애인, 정치적·종교적 소수파, 동성애자 등 모두 1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지난 22일 독일 베를린에 있는 주독일 프랑스 대사관의 벽에 홀로코스트 희생자 이름을 비추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희생자를 기억하고 비극의 과거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2일 독일 베를린에 있는 주독일 프랑스 대사관의 벽에 홀로코스트 희생자 이름을 비추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희생자를 기억하고 비극의 과거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스라엘에선 51년부터 희생자·생존자 모임
사실 홀로코스트 추모일은 유엔총회 결의 이전에도 이스라엘·독일·영국 등에서 개별적으로 기려왔다. 이스라엘에선 1949년 건국한 지 2년이 지난 1951년 민간에서 이 날을 추모일로 정해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 모임과 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어왔다. 피해자들이 기억하는 날로 시작된 셈이다. 이스라엘 국회엔 크네세트는 1959년 유대력 니산월(그레고리우스력으로 4~5월에 해당한다) 27일을 ‘홀로코스트와 영웅주의 기억의 날’로 제정했다. 히브리어를 줄여 ‘욤하쇼아(홀로코스트의 날)’로 부른다. 쇼아는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웅주의’라는 용어를 넣어 당시 희생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도 함께 기린다.

지난 2019년 1월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을 맞아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찾은 생존자들. 오스트리아는 지난 27일 자국에 거주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400여 명에게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우선권을 부여하고 접종 센터에 초대했다. AP=연합뉴스

지난 2019년 1월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을 맞아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찾은 생존자들. 오스트리아는 지난 27일 자국에 거주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400여 명에게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우선권을 부여하고 접종 센터에 초대했다. AP=연합뉴스

영국은 2001년 1월 27일을 홀로코스트 추모일(Holocaust Memorial Day·HMD)라는 기념일로 정해 매년 기리고 있다. 영국은 2005년 이후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설립된 홀로코스트 추모 재단이 행사를 주도한다. 2005년 ‘학살 기억: 미래를 위한 교훈’이라는 주제를 전한 데 이어 매년 행사 주제를 정해 추모한다. 올해 2021년에는 ‘어둠 속의 빛이 되자’를, 지난해 2020년에는 ‘함께 서자’를 각각 주제로 삼았다.

1998년 9월 방한한 당시 독일의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사진=국회사진기자단

1998년 9월 방한한 당시 독일의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사진=국회사진기자단

독일 헤어초크 대통령, 96년 기념일 선포
독일에선 1996년 1월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1934~2017년, 재임 1994~1999년)이 이날을 ‘국가사회주의(나치) 피해자 추모의 날’로 제정하면서 독일에서도 기념일이 됐다. 헤어초크는 독일이 1990년 통일을 이룬 뒤 처음으로 취임한 대통령이다. 피해자를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추모일이 가해자의 나라였던 독일로 확산한 것이다. 2012년 유엔총회가 이를 국제적인 기억의 날로 정한 건 이런 노력이 바탕이 됐다.
헤어초크는 1994년 7월 취임한 뒤 유난히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공을 들였다. 취임 직후인 그해 8월 1일 폴란드에서 열린 바르샤바 봉기(1944년 8월1일~10월 2일) 50주년 추모행사에 참가해 폴란드인의 저항을 칭송했다. 바르샤바 봉기는 제2차 세계개전 중이던 1944년 당시 소련군이 나치를 밀어내며 폴란드로 다가오자 폴란드인 저항 세력이 무장 봉기한 사건이다. 2차대전 중 최대 규모의 반나치 저항 봉기다. 하지만 63일의 봉기 기간 동안 미군이 공중 지원을 해줬을 뿐 소련군은 이를 방치하는 바람에 폴란드인은 바르샤바 시내에서 처절한 시가전 끝에 패퇴하고 항복했다. 결국 1만5200여 명의 폴란드 저항세력이 숨지고 1만5000명은 포로가 됐다. 여기에 더해 시민 15만~20만 명의 목숨을 잃었고, 70만 명이 도시 밖으로 추방됐다. 바르샤바 시내는 벽돌 더미로 변해갔다.
이는 1943년 4월 19~5월 16일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에서 유대인 저항세력이 중심이 돼 나치에 대항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는 달리 폴란드인이 중심이 된 무장봉기다. 1943년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 때는 1만3000여 명이 숨지고 4만여 명의 게토 주민이 쫓겨났으며 이 가운데 3만6000여 명은 유대인 절멸 수용소로 이송됐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12월 7일 국교 재수교 협상을 위해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 게토 봉기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어 서독의 탈나치화와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보였다.

소련군에 의한 아유슈비츠 나치 강제수용소 해방 7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2015년 1월 16일 현장을 찾은 막스 신들러와 로즈 쉰들러 부부. 아우슈비츠 생존자다. 이제 91세가 된 이들은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미국 샌디에이고의 집에서 767주년을 맞았다. AP=연합뉴스 )

소련군에 의한 아유슈비츠 나치 강제수용소 해방 7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2015년 1월 16일 현장을 찾은 막스 신들러와 로즈 쉰들러 부부. 아우슈비츠 생존자다. 이제 91세가 된 이들은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미국 샌디에이고의 집에서 767주년을 맞았다. AP=연합뉴스 )

헤어초크, 바르샤바 봉기, 아우슈비츠 행사 참석
독일의 헤어초크 대통령은 1994년 8월 바르샤바 봉기 60주년 행사에 참석해 독일인으로서 이를 반성하고 참회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헤어초크는 이 자리에서 연설하며 폴란드인에게 용서를 구했다. 통일 독일은 여전히 나치의 잔학한 행위를 규탄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는 이어 1995년 1월 27일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서방 지도자로선 드문 행보였다. 당시 폴란드 남부 대도시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정부가 벌인 공식 추모 행사 대신 직접 아우슈비츠 수용소 현장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이어 1996년 1월에는 이 날을 ‘국가사회주의(나치) 피해자 추모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의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헤어초크의 과거사 반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7년에는 집시 집단을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공식 인정했다. 독일에는 17만~30만 명의 집시 집단(로마로 부름)이 거주하며 유랑 생활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신티어라는 고유어와 함께 대부분 독일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숫자가 작은 데다 독일 국적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어 정치인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초크는 그간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집시 집단에 대한 독일의 역사적 과오를 인정했다. 법학 교수와 헌법재판관 출신의 헤어초크는 재선을 추구하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여생을 공익을 위해 일했다. 피해자인 유대인들의 기억 노력, 2차대전 승전국인 영국의 추모, 그리고 가해국을 승계한 국가인 독일의 헤어초크 대통령이 벌린 노력이 바탕이 되었기에 2005년 유엔총회 결의를 통해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이 정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베를린의 독일 국회의사당인 분데스타크 입구에 유대교 랍비가 독일의 상징은 독수리상을 보고 있다. 이날 분데스타크에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가가 열렸다. 독일의 사과와 반성은 끝이 없다. AP=연합뉴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베를린의 독일 국회의사당인 분데스타크 입구에 유대교 랍비가 독일의 상징은 독수리상을 보고 있다. 이날 분데스타크에선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가가 열렸다. 독일의 사과와 반성은 끝이 없다. AP=연합뉴스

독일-이스라엘의 특수한 관계
올해 1월 27일은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홀로코스트 추모 행사는 어김없이 치러졌다. 이날 이스라엘과 미국, 유럽 각지에서 추모 행사 벌어졌지만 독일서 가장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미 도시 한복판에 거대한 홀로코스트 추모 조형물이 들어선 독일 수도 베를린의 연방의회에선 물론 이 나라 전역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추모와 반성을 가해자가 솔선해서 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이스라엘과 독일은 이런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독일 국제방송인 독일의 소리(Deutsche Welle·DW)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독일이 함께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추모하면서 각별한 동맹 관계를 이룬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51년 이래 지난 70년 동안 양국 지도자들의 눈물 겨운 노력이 바탕이 됐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베를린의 독일 국회의사당인 분데스타크에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앞줄 오른족)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뒷줄 오른쪽)이 헌화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이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베를린의 독일 국회의사당인 분데스타크에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앞줄 오른족)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뒷줄 오른쪽)이 헌화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이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51년 독일 총리 사과로 관계 시작, 52년 보상 합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됐을 당시 독일은 동·서독 할 것 없이 연합국의 점령 상태라 달리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1949년 탄생한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1876~1967년, 1949~1963년 재임)가 먼저 홀로코스트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아데나워 총리는 1951년 “독일은 유대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나치 범죄를 시인하고 이스라엘에 사죄의 말을 건넸다. 아데나워 총리는 이듬해인 1952년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인 다비드 벤구리온(1986~1973년, 1949~1954년 재임)과 회담하고 나치에 핍박받고 학살당한 유대인과 그 자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기로 합의했다. DW에 따르면 합의 금액은 34억5000만 마르크(2002년 유로화 출범 전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유통한 통화)였으며 이는 17억5000만 유로, 19억5000만 달러에 해당한다. 아데나워의 정책은 당시 서독에선 인기가 없었다. 여론조사 결과 11%만 배상에 찬성했을 정도다.
당시 서독은 이스라엘과 국교도 맺지 않은 상태였다. 서독은 보상을 매개로 국교를 추진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에선 피 묻은 돈이라며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600만의 동족을 나치에 잃은 유대인의 원한은 컸으며 보상으로 달랠 수 없었다. 그래도 아데나워는 결단했고, 역사릐 바퀴를 돌렸다.

롤프 프리드만 파울스 초대 이스라엘 주재 서독 대사(오른쪽)가 1966년 미국의 우대계 언론인 메이어 바이스갈과 함께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서독 총리의 이스라엘 도착을 기다라고 있다. 파울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교로 참전해 동부전선에서 왼팔을 잃은 상이군인이다. 미국과 중국, 나토 등 주요국 대사를 지냈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롤프 프리드만 파울스 초대 이스라엘 주재 서독 대사(오른쪽)가 1966년 미국의 우대계 언론인 메이어 바이스갈과 함께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서독 총리의 이스라엘 도착을 기다라고 있다. 파울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교로 참전해 동부전선에서 왼팔을 잃은 상이군인이다. 미국과 중국, 나토 등 주요국 대사를 지냈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양국 국교는 56년 전인 65년에야 수립
양국 국교 수립은 13년이 더 지난 65년 5월 12일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아데나워의 뒤를 이은 서독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1897~1977년, 재임 1963~1966년)과 벤구리온의 후임인 이스라엘의 레비 에슈콜(1895~1969년, 재임 1963~1969년) 총리 재임 시절이었다. 실용주의와 현실주의 정치가 바탕이 됐다. 하지만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독일의 초대 이스라엘 주재 대사로 롤프 프리드만 파울스(1915~2002년)이 부임하자 이스라엘에선 대규모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파울스는 나치 정권이 들어선 다음해인 1934년 군에 입대해 직업군인으로 1945년 종전 때까지 근무했다. 동부 전선에서 중대장으로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다 중상을 입고 왼팔을 잃었다.
터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다 엘리트 코스인 참모학교를 마치고 1944년 네덜란드에 배치됐던 363 민중척탄사단 참모로 배치됐으며 그해 9월 17~25일 연합군이 벌인 마켓가든 작전에 맞서 싸웠다. 파울스는 그해 12월 기사 십자장 훈장을 받았다. 그가 이미 2급과 1급을 받았던 철십자 훈장보다 등급이 높은 훈장이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기념탑 앞에 놓인 조화를 주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이날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해 폴란드인, 소련인, 집시, 동성애자, 정치적 반대파, 종교적 소수파 등 1100만 명의 나치 박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이다. AP=연합뉴스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기념탑 앞에 놓인 조화를 주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이날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해 폴란드인, 소련인, 집시, 동성애자, 정치적 반대파, 종교적 소수파 등 1100만 명의 나치 박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이다. AP=연합뉴스

서독 초대 이스라엘 대사, 반나치였지만 이스라엘 오해
하지만 사실 그는 반나치 인사였다.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으며 동료들의 침묵으로 체포를 피했다는 증언이 있다. ‘라슈펜베르크 암살미수’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암호명 발키리’라는 이름으로 영화화했다. 이를 기획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등이 체포돼 처형됐으며, 가담한 에르빔 롬멜은 강요에 의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백교회의 설립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연루돼 종전을 한달 앞둔 1945년 4월 처형됐다. 파울스는 이런 히틀러 암살 기획에 극비리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시위대는 나치 시절 군 장교 근무 경력과 훈장에 주목했다. 파울스는 서독의 초대 주이스라엘 대사로 근무하면서 1966년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의 이스라엘 방문을 성사시켰다. 파울스는 그 뒤 주미대사(1968~1973년), 주중대사(1973~1976년), 주나토대사(1976~1980년)을 지냈다. 서독으로선 외교부의 유망주를 이스라엘에 초대 대사로 보낸 셈이다.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빌리브라느 국제공항에 주기한 이스라엘 항공사인 엘알의 여객기의 옆구리에 '우리는 기억한다'는 구호가 부인다.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을 전후한 퍼포먼스다. AP=연합뉴스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빌리브라느 국제공항에 주기한 이스라엘 항공사인 엘알의 여객기의 옆구리에 '우리는 기억한다'는 구호가 부인다.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을 전후한 퍼포먼스다. AP=연합뉴스

브란트 무릎꿇기로 좋아졌다, 뮌헨 봉기로 나빠졌다
그 뒤 1970년에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의 게토 봉기 추념비 앞에서 ‘바르샤바 무릎꿇기’를 하며 과거사를 반성하고 신생 서독인의 진심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나치 시절 노르웨이에 망명했던 브란트는 2차대전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동유럽과 관계를 개선하는 ‘동방정책’을 실현해 국제사회에서 서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통일을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유대인들이 벌였던 바르샤바 게토 추념비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서 서독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상당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독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에 벌어진 ‘뮌헨 학살’로 다시 위기가 왔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분파인 검은 구월단 무장대원들이 서독 극좌파의 지원을 받아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을 구금했다가 전원 학살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서독은 1976년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작전을 지원하면서 다시 관계 개선에 나섰다. 엔테베 작전은 팔레스타인 무장대원에 의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억류돼 있던 피랍 에어프랑스 여객기 승객을 이스라엘 특공대가 전원 구조해 데려온 군사 작전이다. 당시 남치됐던 사람은 맹장염 수술을 받으러 수도 캄팔라 시내에 실려간 영국인 할머니만 빼고 전원 구조됐다. 이스라엘 특공대 중에는 대장인 요나단 네타냐후가 전사했다. 요나단은 현재 이스라엘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의 형이다. 이스라엘이 엔테베 작전을 펼 당시 서독은 특수부대를 파견해 요원을 훈련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양국이 군사 협력을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진 것은 물론이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해방한 나치의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어린이들. 팔에 수감번호를 문신했다. EPA=연합뉴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해방한 나치의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어린이들. 팔에 수감번호를 문신했다. EPA=연합뉴스

80년대 베긴 총리, 서독 슈미트의 군 경력 문제 삼아
하지만 이듬해 이스라엘에서 메나헴 베긴 총리(1913~1992년, 재임 1977~1983년)이 들어서면서 급랭했다. 강경 시오니스트로 우파 리쿠드당을 창당한 베긴은 이스라엘 건국 전 시오니스트 민병대인 이르군에 가담해 무장 투쟁을 벌인 인물이다. 베긴 총리는 이스라엘 방문이 추진되던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1918~2015년, 재임 1974~1982년) 총리의 과거 이력을 문제 삼았다. 슈미트는 나치 시절인 1937년부터 종전까지 독일군 제1전차사단 등에 근무하면서 동부전선에선 소련 침공, 레닌그라드 포위작전, 모스크바 전투 등, 서부전선에선 벌지 전투 등에 각각 참전했다. 최종 계급은 중위였다. 베긴은 슈미트 총리의 이런 군 경력을 문제 삼은 것은 물론 벤구리온이 받아들였던 홀로코스트 피해자 보상금을 “피묻은 돈”이라고 비난했다.
앵국의 냉랭한 관계는 베긴이 총리에서 물러난 1983년까지 계속됐다.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입구. 나치 강제수용소 시절 그대로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ARBEIT MACHR FREI)'라는 구호가 입구에 적혀있다. 오늘날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독일의 눈물 겨운 사과와 반성 노력으로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입구. 나치 강제수용소 시절 그대로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ARBEIT MACHR FREI)'라는 구호가 입구에 적혀있다. 오늘날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독일의 눈물 겨운 사과와 반성 노력으로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정상 방문 외교로 양국 관계 확고히 정착
서독은 1982년 헬무트 콜 총리(1930~2017년, 재임 1982~1998년)가 총리가 되면서 이스라엘 외교를 강화했으며 통일을 이룬 1990년 이후 적극적인 대 이스라엘 외교를 펼치면서 더욱 밀접한 교류와 협력 관계를 다졌다. 독일이 통일을 이뤘다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1992년 이츠하크 라빈(1922~1995년, 재임 1974~1977년, 1992~1995년)이 이스라엘 총리로선 처음으로 독일을 공식 방문했다. 라빈 총리는 통독 뒤 처음으로 독일을 찾은 외국 지도자이기도 했다. 이 방문은 화해 분위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양국의 얼마나 특별한 관계인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외교 활동이었다.
1994년 이스라엘의 에제르 바이츠만 대통령(1924~2005년, 재임 1993~2000년)은 독일 통일 뒤 연방국회에서 외국 정상으론 처음으로 연설했다. 통일 독일의 첫 손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다. 1994년 독일 통일 뒤 처음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던 로만 헤어초크는 취임 뒤 첫 방문지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1999년 이스라엘 에후드 바라크 총리(78·1999~2001년 재임)는 독일의 수도 이전 뒤 첫 베를린을 방문한 해외 지도자가 됐다. 독일의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는 이스라엘에 반드시 나타났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베를린의 연방의사당인 분데스타크에서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메르켈은 2008년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세트에서 연설하면서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역사적인 책임을 진다. 이는 독일이 존재하는 이유다.”라는 말을 했다. 국제사회에서 독일과 메르켈이 존경받는 이유다. 로이터=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지난 27일 베를린의 연방의사당인 분데스타크에서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메르켈은 2008년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세트에서 연설하면서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역사적인 책임을 진다. 이는 독일이 존재하는 이유다.”라는 말을 했다. 국제사회에서 독일과 메르켈이 존경받는 이유다. 로이터=연합뉴스

그칠줄 모르는 독일의 사과와 반성…메르켈도 동참
독일의 사과와 반성을 그칠 줄 몰랐다. 2000년에는 독일의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1931~2006년, 재임 1999~2004년)이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세크에서 연설하면서 독일 국민의 이름으로 용서를 구했다.
그 정점은 2008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67·재임 2005~)의 연설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60주년을 맞아 독일 총리로 처음으로 이스라엘 국회인 크네세트에서 연설한 메르켈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역사적인 책임을 진다. 이는 독일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처럼 독일은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보상과 도덕적·역사적 책임을 다해왔다. 이스라엘도 이에 호응해 마음을 열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하면 국제 홀로코스트 추념일 행사를 두 나라가 함께 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난주 독일 대사관에서 받은 한 장의 e-메일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점령했을 당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죽음의 문'으로 불린 곳이다. 피해자인 유대인 생존자들이 1951년 기념하기 시작한 해방일은 1996년 독일에서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에 의해 기념일이 됐고, 2005년 유엔총회에서 국제 기념일이 됐다. 인류가 잊어서는 안될 역사다. EPA=연합뉴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점령했을 당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죽음의 문'으로 불린 곳이다. 피해자인 유대인 생존자들이 1951년 기념하기 시작한 해방일은 1996년 독일에서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에 의해 기념일이 됐고, 2005년 유엔총회에서 국제 기념일이 됐다. 인류가 잊어서는 안될 역사다. EPA=연합뉴스

독일 외교부, “독일 외교는 홀로코스트에서 출발”
독일 외교부 홈페이지에는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독일은 이스라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줄기는 독일의 쇼아(홀로코스트의 히브리어), 국가사회주의 아래에서 600만 명의 유럽 유대인을 고의적으로 인종학살한 데 대한 독일의 책임에서 비롯한다. 1965년 5월 12일 양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해 양국 관계는 공식 차원은 물론 민간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깊어지고 더욱 강해졌다. 양국은 2008년 독일-이스라엘 정부간 협의체를 구성하기에 이르렀으며 2018년에 7회를 맞았다.
독일과 이스라엘간의 독특한 관계는 독일 외교정책의 토대를 이룬다. 독일은 이스라엘의 존재 권리를 옹호한다. EU의 적극적인 파트너로서 독일은 중동의 편화 노력을 지지한다. 유엔에서 독일은 중동 분쟁 당사자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옹호한다.
-중략-
독일은 1952년 룩셈부르크 합의에서 유대인 학살 피해자와 가족에게 15억3000만 유로 상당을 보상하기로 했다. 현재까지 독일은 모두 740억 유로를 보상금으로 지급했으며 여기에는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는 나치 박해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290억 유로가 포함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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