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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성공적 추격자 관성 벗어나야 선도국가로 도약할 수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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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전환의 갈림길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기술은 도약하지 않는다. 기술마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전까지의 축적 위에 작은 한 걸음씩 쌓아 발전하는 데는 예외가 없다. 오늘 한국의 산업을 뒷받침하는 기술도 예외 없이 어제의 역사 위에 서 있다. 내일 도전할 기술의 전망 또한 오늘까지 걸어온 경로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한국 기술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라 미래 기술혁신의 보폭과 방향을 가늠하는 지침이기도 하다.

‘비교우위’ 거부하고 황무지에서 일궈낸 산업 기술 #선진기술 응용 넘어 자체 기술로 뛰어난 성능 달성 #기업 전략에서 정부 정책까지 국가의 틀 모두 바꿔 #시행착오 각오하는 도전적 인재 키우는 게 관건

2019년 한국공학한림원이 ‘한국산업기술발전사’라는 소중한 기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필자는 4년간 이 작업에 참여하면서 직접 자료를 검토하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한국 기술의 어제의 발자취와 오늘의 한계, 그리고 넘어서야 할 내일의 과제를 그려낼 수 있었다. 한국산업기술발전사의 몇 장면을 되살려보면 이렇다.

폐차된 미군 지프로 만든 시발자동차

한국의 산업과 기술은 글자 그대로 황무지에서 출발했다. 1953년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했다. 60년대 중반까지도 필리핀의 3분의 1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1960년 당시 2500만 인구 중 1400만 명이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최빈국이었다. 물리적 산업기반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기술의 기초지식도 전무했다. 1955년 최초의 자동차로 불리는 시발자동차도 폐차된 미군용 지프의 부품을 재활용해 조립한 것이었다. 1959년에서야 일본 모델을 기초로 최초의 라디오를 조립 생산했는데, 인공지능의 출발을 알린 다트머스 회의가 이미 1957년에 개최되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당시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비교우위 전략이란 한 마디로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당시 한국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거나 기술이 필요 없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특화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실제로 해외 전문가들 대부분은 그렇게 조언했고, 많은 개발도상국이 그 조언을 따랐다. 한국 산업기술의 역사는 놀랍게도 이 비교우위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발전해온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종합제철소 건설이 본격화한 1960년대 말 해외 기관들은 기술이 전무하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실패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협조를 거부하기도 했다. 1983년 반도체 산업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일본의 미쓰비시연구소가 한국은 기술력이 없고, 내수시장이 작을 뿐만 아니라 전후방 산업이 취약하고, 사회간접자본도 형편없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호텔방서 밤샘 기록한 ‘이 대리 노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한국 산업 그래픽=신용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한국 산업 그래픽=신용호

결심은 장하지만 쌓인 기술이 없으니 밑바닥부터 배워가야 하는 지난한 과정은 피할 수 없었다. 1971년 대형 유조선 2척을 최초로 수주했으나 설계나 생산 그 어느 한 부분의 기술도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었다. 결국 영국 스콧 리스고의 26만t급 유조선 설계도면과 덴마크 오덴세 기술자들의 생산기술, 일본 가와사키 기술자들의 조언을 이리저리 조합해 나갔다. 1972년에는 60명의 핵심 기술인력이 영국 킹스턴 조선소에 파견되어 기술연수를 받기도 했다. 좌충우돌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1974년 건조에 성공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의 기술자들은 스펀지처럼 선진 지식을 빨아들였다.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인 포니를 개발하기 위해 1974년 이탈리아로 기술연수를 떠난 한 청년 기술자는 10개월 동안 보고들은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노트에 기록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눈치껏 기억하고, 허름한 호텔 방에서 밤새 기록하고 있었을 그 젊은 기술자의 정성은 지금까지 ‘이 대리 노트’로 남아 있다.

흡수된 기술을 바탕으로 어렵게 만들어진 산업기술 기반은 곧이어 수직적으로 연관된 부품소재 분야가 커 나가는 시발점이 됐다. 반도체 산업을 본격 시작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89년에 국내 한 중소기업이 반도체 핵심소재로서 최근 한·일 무역분쟁의 와중에 잘 알려진 포토레지스터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기계산업의 꽃이라고 하는 공작기계 산업도 자동차 생산이 시작된 직후인 1975년부터 싹이 텄다.

그뿐만 아니라 개미가 한 칸씩 옆으로 집을 넓혀나가듯 수평적으로 이웃한 산업기술 분야로도 파급돼 갔다. 70년대부터 통신분야 핵심기술인 유선전화의 전자교환기시스템 기술에 도전했고, 1986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성공했다. 이 자체 기술을 지렛대 삼아 디지털 무선통신 분야의 기술을 가진 미국의 퀄컴사와 힘을 합쳤고, 1996년 CDMA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한국산 휴대폰의 성공 스토리가 이어진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바이오시밀러 산업도 생명공학 기술이 필수적이지만, 초고도의 품질 유지와 공정 관리가 핵심이라는 특성 때문에 반도체 산업에서 축적된 공정기술, 그리고 전자·기계·소재·장비·엔지니어링 등 연관산업의 기술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시작할 꿈도 꿀 수 없었다.

추격모델로는 선진국 넘어설 수 없어

한국 산업과 기술의 오늘은 비교우위를 떨쳐낸 성공적 추격의 결실이다. 선진기술을 도입하고 응용하는 단계를 넘어 자체 기술로 더 뛰어난 성능을 달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산업기술 발전사에서는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하였는데, 국산화에 성공했다’거나 ‘세계 네 번째로 개발하였다’, 혹은 ‘선진 기술보다 성능이 더 좋은 기술을 최초 개발했다’는 자랑스러운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 한 줄을 얻기 위해 흘렸을 땀과 눈물이 감동적이지만, 이제 그 성공적 추격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또 다른 전환기에 들어섰다. 지금까지의 추격모델로는 선진국의 견제를 넘어설 수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규모의 경제와 혁신속도를 당해낼 수도 없다. 전환은 생존의 문제다.

우리 앞에 놓인 마지막 도전의 관문은 지금까지와 종류가 다르다. 선진국이 제시한 게임의 룰에 따라 그들만큼 혹은 그들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얻는데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로드맵을 만드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전략부터 정부 정책까지 추격의 관성에 익숙한 국가의 틀이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글자 그대로 ‘대전환’이 필요하다.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실수 없이 성실히 답하는 인재가 아니라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인재는 어떻게 길러낼 수 있을까. 작은 실험을 축적하면서 혁신적 개념설계를 진화시켜나가는 선도형 기업전략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실패의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시켜 줄 정부 재정의 역할이 무엇일까.

산업정책과 과학기술정책은 또 어떻게 변모해야 할까. 시행착오에 대해 책임부터 묻는 관행이 아니라 교훈을 얻어 다음 단계로 진화해나가는 실용적인 사회 문화가 정착되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가야 한다. 오늘 한국은 추격자의 관성을 벗어나 선도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대전환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안정적 직장, 명예 포기…가난한 고국으로

산업기술발전사는 기술적인 자료의 묶음이지만,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25명의 해외유치 과학기술자들이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기초를 놓았다는 기록은 그 앞뒤 행간에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이들은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의 안정된 직장과 아이비리그의 명예로운 교수직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가난한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현실과 사명감 사이에 번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IMF 위기 때 많은 정밀기계분야 기업들이 로봇사업을 접었고, 이때 퇴직한 젊은 기술자들이 오늘날 성공한 로봇벤처들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다. 몇 줄 문장에 불과하지만, 그 행간에는 불안과 열정이 섞인 청년 기술자들의 고민이 올곧이 배 있다.

신약 하나를 만들기 위해 1158번 합성을 실패한 끝에 후보 물질을 찾고, 임상 과정을 밟아 거의 20년 만에 결실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함께 하던 사람의 절반이 이미 회사를 떠난 뒤 당시 주임이었던 젊은 연구자가 지금은 중년의 상무가 되어 들려주는 회고는 기술발전의 과정이 결국 인간의 기록임을 잘 말해준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석류 한 톨도 절로 붉어졌을 수 없듯, 개도국들이 부러워하는 오늘의 한국 산업 또한 저절로 자라났을 리 없다. 무엇보다 산업과 기술 개발의 치열한 현장으로 뛰어들었던 우수한 인재들이 결정적인 토양이자 자양분이었다.

2021년 한국 산업의 현장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람 이야기가 쓰이고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더 도전적인 기업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는 기술자, 더 창의적인 시도를 하는 과학자, 그리고 그들의 도전적 시행착오를 뒷받침하는 실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가제도와 사회문화가 없이는 진정한 기술선진국으로 가는 마지막 도약은 기대할 수 없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