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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이름이 없는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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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

최근 보도한 사건 중 피해자의 이름을 공개하고 싶은 사건이 있었다. 취재 윤리에 어긋나더라도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아이들이 있었다.

이달 초 인천에서 8살 여자아이가 엄마 손에 목숨을 잃었다. 사인은 질식사. 엄마는 구속됐고, 가족과 떨어져 생활비를 보내던 아빠는 딸의 죽음을 알게 된 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딸을 혼자 보낼 수도 없고, 딸 없이 살 자신이 없다”는 유서를 택배 트럭에 남겼다. 아빠는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물건을 옮겼다.

시선203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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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아빠의 동생인 최모씨는 기자에게 조카의 사망진단서를 보여줬다. 그 이름난엔 이름이 없다는 뜻의 ‘무명녀(無名女)’란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아이는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았다. 엄마는 전남편과 이혼하지 않았고, 현행법상 사실혼 관계의 아빠는 아이를 낳은 여성의 협조 없이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죽은 아이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살았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가지 못해 친구도 없었다. 의료보험 혜택 역시 받지 못했다. 아빠의 휴대폰엔 아이의 사진과 영상이 가득했다. 영상 속에서 회전목마를 타던 아이에게 아빠는 “○○아~ 여기 보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피해자를 중심에 두면 안 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이 사건 만큼은 아이의 실명을 공개하고 싶었다. 이름 없이 죽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더 기억해주지 않을까, 이런 현실에 더 분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양천 아동학대 사건’이 ‘정인이 사건’이라 불릴 때 보다 큰 분노를 자아냈듯이 말이다. 하지만 ‘정인이 사건’은 ‘양천 아동학대 사건’이라 불려야 하듯, 결국 피해자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는 이런 유령 같은 아이들이 꽤 많이 살고 있다. 서류상 존재하지 않으니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기자는 지난달에만 그런 아이를 세 명이나 만났다.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신고를 못 한 네살 송모양을 키우는 미혼부 송창순씨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작은 집에서 혼자 뛰노는 아이가 인터뷰하던 아빠에게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했다. 아이는 그저 아빠를 불렀을 뿐인데, 그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서류상의 아무 기록이 없는 유령 같은 존재가, 스스로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6월 이러한 아이들을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서류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이라 정의했다. 모든 아이에겐 천부적인 출생등록의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 판결 이후 입법이 따라오지 못해 여전히 출생신고를 못하는 미혼부의 아이들이 살고 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지만, 죄인처럼 사는 아이들이 이름도 없이 살고 있다.

박태인 JTBC 기동이슈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