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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단종이 수렴청정 받았다면 세조의 찬탈 가능했을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5) 

수렴청정은 조선시대에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 혹은 왕대비(王大妃)가 발을 치고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자 운영방식이다. [사진 pixabay]

수렴청정은 조선시대에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 혹은 왕대비(王大妃)가 발을 치고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자 운영방식이다. [사진 pixabay]

왕비는 왕이 살아 있을 때는 그 배우자로서 내외명부(여성의 품계)를 다스리고 왕실 안주인으로의 역할 이외에는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이렇게 왕의 뒤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왕비가 정치 전면에 나서야하는 때가 있으니 바로 왕의 승하로 차기 왕권의 승계과정에서 후계를 지목해야 하는 순간 모든 결정권을 쥐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다.

왕비는 왕 또는 상왕이 승하하고 나면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된다. 이때 왕위계승자로 세자가 결정이 돼 있는 경우 대왕대비는 옥새를 가지고 있다가 세자에게 대보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옥새를 전달하는 의례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왕위 계승자에게 승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왕이 승하한 시점에서 후사가 없거나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비는 다음 왕위를 이을 국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선왕이 후사 없이 승하해 직계승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대비의 승계 지명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이었다.

다음으로 대비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은 수렴청정으로 새 국왕이 친정을 펼칠 수 있는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수렴청정은 조선시대에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혹은 왕대비가 발을 치고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자 운영방식이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 이전 왕의 어머니가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에서 변화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국왕을 도와 국정을 의논하는 대왕대비가 발을 내리고(垂簾) 그 뒤에 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라고 했다. 수렴청정은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을 줄인 용어로, 말 그대로 발을 치고 함께 정치를 듣는다는 의미다. 발을 치는 이유는 조선이 남녀 간의 내외를 엄격히 구분하였던 유교 국가였기에 아무리 왕실의 어른이라 할지라도 남자 신하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업무를 보는 것은 내외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지할 데 없었던 단종의 비극

영월군 영모전 단종 어진 (단종의 조각을 목상으로 새겼다가, 목상이 훼손되자 그림으로 그렸다. 1926년 이모본.)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영월군 영모전 단종 어진 (단종의 조각을 목상으로 새겼다가, 목상이 훼손되자 그림으로 그렸다. 1926년 이모본.)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단종은 병약한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당시 단종이 어리기는 했지만 후대에 단종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보호받은 왕들이 친정을 펼친 나이를 생각하면 단종도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역량을 키워 성년 국왕이 되었다면 무난히 국정운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나이가 15세였고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영월에 귀양 가서 사약을 받은 때가 17세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냥 나이가 어린 왕이 왕위를 운영할 수 없어 찬탈 당했다는 현실은 극복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시점이나 더구나 죽임을 당한 나이가 이미 청년이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 곁에서 단종을 도와 성년 왕으로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면 단종의 비극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가설이다.

부왕 문종이 승하하고 즉위한 단종에게는 어머니(현덕왕후)와 할머니(소헌왕후)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어린 왕을 도와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만약 소헌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고 단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면 세조가 조카를 내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진 못했을 것이다. 당시 단종을 양육한 서조모 혜빈 양씨가 있었지만, 세종의 후궁으로 뒤늦게 궁에 들어와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고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들이 의정부를 중심으로 정국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에 야망을 품은 수양대군은 조카인 어린 임금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계유정난(1453)을 일으켰고 영의정에 올라 직접 단종을 대신해 정무를 관장하며 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양대군에 의해 금성대군(세종의 6남)과 측근의 궁인, 신하들마저 유배와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극도의 압박을 느낀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조선 7대 국왕 세조 어진 초본, 1927년 이당 김은호 모사본.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조선 7대 국왕 세조 어진 초본, 1927년 이당 김은호 모사본.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세조 1년(1455) 윤 6월 11일 1번째기사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하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왕 자신의 실정이나 큰 과오가 없는 상황에서 왕위를 찬탈 당했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사례는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그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세조는 재위 내내 죽음으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학사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세조는 이 성리학적 논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으로 성종 대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어린 왕을 보호하는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은 그 당위성이 부각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종(정희왕후), 명종(문정왕후), 선조(인순왕후), 순조(정순왕후), 헌종(순원왕후), 고종(신정왕후 조씨) 등 6명의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수렴청정을 받았고, 철종(순원왕후)은 19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왕족으로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즉위하였기에 순원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한 경우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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