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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마스크 시대에 느끼는 ‘눈빛의 가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87) 

외출할 때 꼭 챙겨야 할 물건이 핸드폰에서 마스크로 바뀌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고 해도 연말까지는 마스크를 벗을 수 없을 거라고 한다. 모두에게 답답하고 피곤한 일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약간의 긍정적인 면도 찾아냈다. 간단한 외출에는 면도를 생략하거나 눈화장만 살짝 해도 된다. 마스크 덕분이다.

눈으로 말해요. 살짝이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

뜬금없이 이런 알콩달콩한 노랫말이 생각난다. 정말 눈으로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쉽지 않다. 마스크 밖으로 보이는 건 눈썹과 눈뿐, 그 가운데 ‘나’를 표현하는 숙제는 오로지 눈의 몫이다. 눈썹은 감정과 의사를 전할 수 없다. 굵기와 색에 따라 성격을 예단하는 편견이나 조장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눈빛은 말보다 먼저 상대방에게 가고 그것은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눈빛에 어떻게 내 마음을 담을지, 상대방 눈빛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사진 Pixabay]

눈빛은 말보다 먼저 상대방에게 가고 그것은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눈빛에 어떻게 내 마음을 담을지, 상대방 눈빛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사진 Pixabay]

반대 입장에서는 상대방 기분이나 감정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눈뿐이니, 이것 참 어렵다. 눈만 보곤 감정은커녕 전에 만난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내기조차 힘들다.

그런 까닭에 요즘 나는 눈빛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 중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고, 눈빛은 그 사람을 표현한다지만 알고 보니 눈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눈으로 ‘나는 당신에게 호의적임’을 표현하려면 마스크 속에서 입 주변 근육에 크게 힘줘 웃어야 눈이 겨우 따라올까 말까 한다.

우리는 평소에 눈빛의 용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나의 경험 두 편을 소개해 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시골길을 걷는데 배에서 신호가 오더니 참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아버지, 나 똥 마려워.” “그럼 눠야지.” 밭둑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일을 보는데 저쪽에서 한 모녀가 걸어온다. “어? 저기 사람 와. 어떡해?” “네가 먼저 저 사람들 얼굴을 쳐다봐. 그럼 저 사람들이 너를 못 봐.”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과연 모녀는 똑바로 앞만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때는 내가 로봇 태권브이처럼 눈빛 광선으로 그들을 제압했다는 것을 몰랐다.

고1 때였다. 전국에서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일었고, 형들 주도로 우리도 동참을 결의했다. 일요일에 시청료 징수원이 왔다. 내가 나가서 “우리는 시청료 안 내기로 했어요” 했더니 갑자기 그가 ‘어린 것이 어디서 어른한테 눈을 부라리냐’며 화냈다. 오해였다. 나는 본래 눈이 작고, 시력도 나빠 안경 없으면 노려보는 것처럼 보였다. 질풍노도의 시기이던 나 역시 지지 않고 대들었고, 큰 소리에 아버지가 나오셔서 시청료를 내며 그를 이해시켜 보내셨다.

요즘은 시선 폭력 문제가 공론화하고 있지만, 위의 두 경험은 일찍부터 내게 눈빛의 역할과 힘 가운데 특히 물리적인 힘, 때로는 남을 제압하거나 괴롭히는 폭력적인 힘을 깨닫게 해주었다.

눈빛을 표현하는 말은 많다. 눈빛이 다정하다, 따뜻하다, 차갑다, 묘하다, 애매하다, 징그럽다, 사납다…. ‘눈빛에 힘이 있다’도 익숙하다. 의지, 리더십, 총명함, 때로는 누군가를 압도하는 힘을 뜻하리라. 타인의 눈빛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말은 그렇게 다양한데, 정작 나 자신은 그런 눈빛을 갖기 위해 또는 피하고자 노력해 본 적 있었던가.

하긴, 연기자도 아닌 일반인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코, 입, 낯빛의 도움을 받지 않고 눈빛만으로 애정, 동의, 염려, 호의, 찬사, 곤란함, 경고 같은 감정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집 밖에 나서는 순간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리니 상대의 기분이나 감정을 파악할 수 있는 건 눈뿐이다. [사진 박헌정]

집 밖에 나서는 순간 마스크로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리니 상대의 기분이나 감정을 파악할 수 있는 건 눈뿐이다. [사진 박헌정]

그뿐인가. 눈으로 감정을 표현하기는커녕 본심과 눈빛이 제각각인 경우도 많고 심지어 상대방에게 눈길을 주지 않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부터 눈빛을 연습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때로는 똑똑하게, 때로는 온순하고 곱게, 때로는 단호하고, 때로는 여유롭게…. 이를테면 ‘눈빛 교육’이라고 할까?

우리 사회에는 시선이나 눈빛에 대한 지침에 일관성이 없는 것 같다. 우선 시선의 방향에 있어, 어릴 때는 어른 앞에서는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말씀 듣는 게 예의라고 배웠는데, 커서는 상대방 눈을 피하면 실례라고 배운다. 그러니 상대방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에 부담 가지는 사람도 꽤 있다.

눈빛의 힘 조절도 애매하다. 면접 볼 때는 면접관을 밝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응시하되 당당해야 한다고 하는데, 결국 요령껏 호감을 사라는 원론적이고 모호한 말이다.

이처럼 사회생활에서 눈빛은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눈빛이 마음에 들어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눈빛으로 상대를 판단하거나 의심하기도 한다. 상대가 눈길을 주지 않아 기분 상할 때도 있고, 심지어 “뭘 봐?”가 싸움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광속이 음속보다 훨씬 빠른 것처럼, 눈빛은 상대방에게 말보다 훨씬 먼저 가닿는 신호다. 우리는 그것을 ‘인상’이라고 한다. 나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언제부턴가 내 인상이 상당히 굳어져 있음을 느끼곤 한다. 물론 나이 들수록 젊은 시절의 매력적인 모습이 차츰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눈빛만이라도 더 인자하고 따뜻하고 풍부하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특히 요즘은 마스크 때문에 서로 두 눈만 주의 깊게 살피고 있으니 눈빛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남의 눈빛을 정확히 읽는 연습, 내 마음을 눈빛을 정확히 담는 연습,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그것도 어쩌면 스스로를 가꾸는 일이 될 것 같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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