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꽃무늬에 열광했을까, 80년대 강남 아파트를 소환하다

중앙일보

입력 2021.01.31 05:00

업데이트 2021.01.31 10:06

'뉴호-옴' 전시 포스터. 사진 Anteroom Seoul X kkotssul

'뉴호-옴' 전시 포스터. 사진 Anteroom Seoul X kkotssul

고운 꽃무늬가 그려진 반찬 통, 난초 화분과 분재, 아폴로 보온병, 삼각 발이 달린 어항…
어린 시절 한 번쯤 봤음 직한 친숙한 주방 집기가 놓인 싱크대 옆에는 이제는 골동품이 된 금성사 냉장고가 자리했다. 전화번호부가 필수였던 노란색 다이얼 전화기도 반갑다. 주기적으로 밥을 줘야 하는 괘종시계에선 때마다 ‘댕~댕~’ 운치 있는 종소리가 울리고, 책장에 꽂힌 추억의 광고 사진집을 훑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이곳은 2021년에 소환된, 1970~80년대 서울의 아파트 실내 풍경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호텔 안테룸 서울의 갤러리9.5에서 지난 20일부터 열리고 있는 ‘에디티드 서울: 뉴-호옴(이하 뉴-호옴)’전시다.

지난 20일부터 서울 신사동 '안테룸 서울 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에디티드 서울:뉴 호-옴' 전시 전경.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지난 20일부터 서울 신사동 '안테룸 서울 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에디티드 서울:뉴 호-옴' 전시 전경.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눈부신 아파트의 영광!”

대한주택공사 설립 기념 프로젝트로 건설된 한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 아파트(1962)’를 알리기 위해 조선일보가 광고에 썼던 문구다.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던 1970년대.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도입한 국민 주택 면적 85㎡(약 25평)의 아파트는 당시 중산층이라면 누구나 꿈꿨던 욕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전시 ‘뉴-호옴’은 그 시절 강남 아파트의 전형적인 ‘집치레’를 재현하면서 오늘날 한국 디자인의 한 조각 단서를 찾아 나선다.

지금은 한국의 대표적 주거 모델로 아파트가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우리에게 낯선 공간이었다. 농경 사회에서 도시로 갓 진입한 초보 도시인들은 아파트에 꽃과 나무, 자연의 형태를 모방한 무언가를 들이기 시작했다. 넝쿨을 연상시키는 등나무 의자와 소파에는 꽃무늬 가득한 방석이 놓이고, 각종 가전제품과 그릇 등 소품에도 자연의 무늬가 새겨진다. 아파트라는 획일화된 주거 공간에서 거주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실내 장식은 시대의 욕망을 읽는 이미지 사전이기도 하다.

전시 구성을 위해 참고했던 1970-80년대 여성지 사진들. 인물 뒤로 보이는 실내 장식이 눈길을 끈다. 사진 Anteroom Seoul X kkotssul

전시 구성을 위해 참고했던 1970-80년대 여성지 사진들. 인물 뒤로 보이는 실내 장식이 눈길을 끈다. 사진 Anteroom Seoul X kkotssul

이번 전시를 기획한 ‘꽃술’의 이미혜 대표는 “전쟁이 끝나고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좌식생활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입식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던 근현대 시기 한국의 생활 디자인을 조명해보고 싶었다”며 “당시엔 너무 흔한 데다 전통을 모사해서 만들었던 저렴한 기성품들이 많아 가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지만 돌이켜보면 현대 한국의 생활 디자인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대표는 이 시기 디자인을 두고 ‘코리안 빈티지’라는 표현을 썼다.

플라스틱 쓰레받기에도, 돼지 저금통, 주방 집기에도 온통 꽃무늬가 들어갔다.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플라스틱 쓰레받기에도, 돼지 저금통, 주방 집기에도 온통 꽃무늬가 들어갔다.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전시 기획을 위해 가장 많이 참고했던 매체는 1970~80년대의 여성지 화보. 복식이나 화장법을 보여주는 사진에서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주변부의 풍경에 주목했다. 당시 처음 등장했던 오리표·한샘 등 입식 부엌 제품들을 참고해 전시장 한가운데에 커다란 싱크대부터 설치했다. 인테리어 스튜디오 ‘맙소사’의 김병국 소장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민트 컬러의 벽에 레몬색 싱크대가 요즘 디자인처럼 세련되어 보이지만 이미혜 대표는 “당시 광고나 화보에 등장했던 오리표싱크 그대로의 색”이라며 “이처럼 그땐 몰랐는데 돌아보니 참 예쁜 디자인이 많다”고 했다. 여기에 이 대표가 가지고 있던 옛날 그릇들과 소품, 지인들의 오래된 물건들을 총동원했다. 아는 분이 가지고 있던 ‘금성사’ 냉장고가 화룡점정. 여전히 작동하는 냉장고 내부엔 요즘은 사라진 각 얼음을 얼리는 칸도 있다.

빈티지 괘종시계 사이로 설수빈 작가의 의자와 엄아롱 작가의 식물 오브제가 놓여있다.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빈티지 괘종시계 사이로 설수빈 작가의 의자와 엄아롱 작가의 식물 오브제가 놓여있다.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전시장에 옛날 물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이사이에 지금 활동하는 한국 작가 15팀의 디자인 작품들을 더해 한층 풍성하게 구성했다. 자개장을 연상시키는 스튜디오 오리진의 수납장과 80년대 아파트라면 하나씩 있을 법한 등나무 의자를 떠올리게 하는 설수빈 작가의 의자 등이 한 데 섞여 있는 식이다.

전화번호부나 메모지를 넣을 수 있는 미니 서랍장과 다이얼 전화기. 화분에는 꼭 난초가 그려져 있었다.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전화번호부나 메모지를 넣을 수 있는 미니 서랍장과 다이얼 전화기. 화분에는 꼭 난초가 그려져 있었다. 사진 최용준 Choi Yong Joon

“가족 단위로 보러 와 할머니나 아버지가 설명하고 고등학생 자녀들은 신기해하는 풍경을 볼 수 있어요. 작은 전시지만 전통과 현대,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는 1970~80년대 한국의 실내 디자인에 대해 그동안 몰랐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미혜 대표의 말이다. 전시는 오는 2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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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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