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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연공제의 뿌리는 벼농사 체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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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호 20면

쌀, 재난, 국가

쌀, 재난, 국가

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문학과지성사

『불평등의 세대』 이철승 교수 #벼농사 앵글로 불평등 기원 추적 #코로나 방역 대처에는 효과적 #연공제, 임금피크제로 개선해야

지난번에는 ‘세대’, 이번에는 ‘쌀’이다.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가 구조적이고, 그러니까 심각한데도 쉽게 고칠 수 없는 문제이고, 이렇게 된 데는 세대와 쌀의 작용이 있었다는 얘기다. 서강대 사회학과 이철승 교수의 시각이다. 무슨 내용일까.

세대 문제 먼저 살피자. 2019년 책 『불평등의 세대』에서 건드렸다. 이념으로 뭉친 386 민주화 세대, 그 이전의 산업화 세대가 합작해 각종 자원을 장기 독점한 결과 1990년대 출생한 지금의 청년 세대가 고통받는다는 얘기였다. 한때 기득권을 성토했던 386이 기득권화됐다는 지적이다.

쌀 문제는 당연히 이번 책 『쌀, 재난, 국가』에서다. 병렬식 제목에서 내용에 대한 단서를 얻기는 힘들다. 여기서 쌀은 정확하게 벼농사 체제를 가리킨다. 벼농사 전통이 우리 사회 구조적 불평등의 근원이라는 얘기다. 이런 시나리오다.

산자락의 다랑논. [뉴스1]

산자락의 다랑논. [뉴스1]

반드시 한국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벼농사 위주의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 공통 적용되는 가설인데, 벼농사는 필연적으로 공동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게 출발점이다. 파종부터 수확까지 농사의 매 단계마다 집중적인 노동력 투입이 필요해서다. 공동노동의 효과는 만족스럽다. 농업 신기술은 세대 간 또래 간 전수되고 확산된다. 생산량이 늘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벼농사 공동체는 이미 하나의 ‘마을 기업’이었다. 이 마을 기업들이 한국의 경우 60, 70년대 산업화 현장에 이식된다. 벼농사 전통에 뿌리를 둔 협력과 조율의 기술이 발휘된다. 저자가 ‘협업-관계 자본(collaboration-oriented relational capital)’이라고 이름 붙인 미덕이다. 그 결과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궜지만 연공제가 생겨난 게 문제였다. 성장의 과실을 나이순으로 차지하는, 나이 들수록 더 많이 받아가는, 벼농사 공동체 시절 위계 구조의 잔재 말이다.

벼농사 전통의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이웃사촌 간에 경쟁을 유발한다. 남의 농사를 내가 도와줬는데 나보다 소출이 많다면 배가 아플 수밖에 없다. ‘공동생산-개별 소유’의 함정이다. 그 결과 겉으로는 협력하면서 물밑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중 구조, ‘공동체의 유대감’과 ‘비교와 질시의 문화’가 함께 싹트게 됐다는 것이다.

서강대 이철승 교수는 우리 사회 불평등의 근원으로 벼농사 체제를 지목했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서강대 이철승 교수는 우리 사회 불평등의 근원으로 벼농사 체제를 지목했다. [사진 문학과지성사]

이처럼 문제가 있는 벼농사 잔재를 저자가 완전 철폐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장점이 살아있다. 가령 코로나 방역에서 톡톡히 역할을 했다. 서구식 시민의식이 발휘됐거나 집권 정치 세력이 잘해서 선방하고 있다기보다, 동아시아적 협업과 조율, 협업-관계 자본이 빛을 발한 결과에 가깝다는 것이다.

연공제도 마찬가지. 절대악은 아니다. 경제 성장 시절에는 위력을 발휘했다. 협업·협력의 발판이었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연공 원리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공정성 시비가 벌어질 수 있다. 50대 장년층 세대, 그러니까 386 세대가 가장 큰 덕을 보고 있다. (이런 대목에서 『쌀…』은 『불평등의…』와 만난다) 우리 사회의 세대 내 불평등, 세대 간 불평등이 모두 연공제에 응축돼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해결책이 의외로 간단하다고 본다. 연공제를 손보는 것이다. 임금 피크제를 도입하고, 임금 테이블의 기울기를 평탄화해 입사 시점 대비 30년 차의 임금 수준이 평균 3.3배인 현실을 2배 이하로 제한하자고 한다. 30년 차의 임금 상한을 가령 1억원에서 6000만원 정도로 정지시키자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남는 인건비는 정규직 충원이나 신입사원 채용에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의 거대 강성 노조를 떠올리면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해결책이다. 연공제 개혁을 떠올리지 못해서 시행 못 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저자가 책 말미에 소개한 에피소드가 가슴을 친다. “선생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대여섯 번 직장을 옮긴 서른 전후 비정규직 청년이 울먹이며 묻는 질문에 숙연해져 끝내 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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