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도시 꼴찌 팀 결승 견인, 아름답게 마친 ‘축구의 신’

중앙선데이

입력 2021.01.30 00:01

업데이트 2021.01.3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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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호 25면

[죽은 철인의 사회] 마라도나

마라도나

마라도나

멕시코 시날로아 주에 있는 쿨리아칸은 악명 높은 마약왕 엘 차포 구스만의 고향이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미국 교도소에 수감 중인 구스만은 이곳에서 세계 최대 마약 조직인 ‘시날로아 카르텔’을 만들어 엄청난 규모의 마약 생산과 유통을 진두지휘했다.

2018년 멕시코 도라도스 감독 맡아
“마약쟁이가 부임” 언론들 조롱

아르헨 빈민가 출신 동병상련
무명 선수들과 떼춤 등 애정 듬뿍

“온 몸이 아파” 지팡이 짚고 지휘
1년 뒤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2018년 9월, 쿨리아칸을 연고지로 한 프로축구팀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에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가 도착하던 날 공항은 몰려든 취재진과 팬들로 인산인해였다. 당시 도라도스는 멕시코 프로축구 2부리그 꼴찌(15위)였다.

팬들은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언론은 냉담했다. “마라도나는 감독으로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감독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개인적인 문제를 감추려 했다” “코카인 중독이었던 마라도나의 변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회의적인 뉴스가 나왔다. 심지어 “마약쟁이 마라도나가 마약 도시를 찾은 건 당뇨병 환자가 사탕 가게를 찾아온 것과 같다”는 조롱의 글도 떠돌았다.

마라도나는 이 곳에서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한 시즌을 보낸다. ‘마라도나의 팀’ 도라도스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플레이오프 결승까지 진출한다. 비록 결승에서 통한의 역전패를 당해 1부리그 승격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악동’은 ‘명장’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마라도나는 1년 뒤인 2020년 11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도라도스에서 보낸 한 시즌 동안 마라도나의 꾸미지 않은 말과 행동을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시날로아의 마라도나: 끝나지 않은 전설’(7부작)이다. ‘축구의 신’ 이전에 몸과 마음의 고통과 상처로 몸부림치는 ‘인간’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의 맨얼굴을 볼 수 있다.

“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86 멕시코 월드컵 우승 때 마라도나. [중앙포토]

86 멕시코 월드컵 우승 때 마라도나. [중앙포토]

마라도나는 “내 모든 것을 바치러 왔다”고 했다. 그는 특유의 넉살과 스스럼없는 행동으로 선수들과 어울렸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라커룸에서 전통춤 ‘쿰비아’를 추기도 했다. 패배의식에 찌든 선수들은 서서히 마라도나 마법에 걸려들었다. 그는 “실수해도 좋으니 꾸준히 노력하라. 네 발을 믿어라”고 격려했고,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 하나하나를 안아주며 “제군들, 나가서 축구를 해라. 축구답게 축구 해”라고 독려했다.

도라도스는 기적 같은 5연승을 거두며 8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이길 때마다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마라도나와 손에 손 잡고 챔피언이 되리라” 노래를 부르며 떼춤을 췄다.

멕시코 프로축구 2부 도라도스를 이끌던 마라도나 감독. [중앙포토]

멕시코 프로축구 2부 도라도스를 이끌던 마라도나 감독. [중앙포토]

영화에서는 마라도나가 팀 닥터한테서 마사지와 치료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가 아픈지 묻는 닥터에게 마라도나는 “전부 다. 온 몸이 아파. 얼마 전에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어. 관절염 때문에 양쪽 무릎이 아파 죽겠다. 아픈지 30년이 넘었어”라며 고통을 호소한다. 마라도나는 불편한 무릎 때문에 다리를 절었고, 시즌 중반부터는 지팡이를 짚고 경기장에 나선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건강 문제로 괴로웠을 때, 마약 문제에 시달렸을 때 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토로했다.

플레이오프 토너먼트는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됐다. 홈에서 열린 미네로스와의 8강 1차전은 득점 없이 비겼다. 후반 막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마라도나는 심판을 욕하라고 관중을 부추긴다. 퇴장을 당한 그는 2차전에 벤치에 앉을 수 없게 됐다.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마라도나는 1-0으로 앞선 후반 40분, 별안간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못 보겠네. 괴로워서 못 보겠어. 마음이 힘들어”라고 중얼거리며 경기장 주위를 맴돌던 그는 승리 소식을 듣자 그제야 환호성을 내지른다.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전 ‘신의 손’ 장면. [중앙포토]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전 ‘신의 손’ 장면. [중앙포토]

준결승도 파죽지세로 돌파한 도라도스는 결승에서 아틀레티코 산루이스와 만난다. 홈에서 1-0으로 이겼지만 마라도나는 또다시 퇴장을 당한다. 원정 2차전에서 연장전 끝에 역전패를 당하는 순간 산루이스 팬들이 “X이나 빠는 마라도나”라고 합창하는 데 격분해 관중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마라도나는 1960년 10월 30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3남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위험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마라도나는 축구에 천재적인 재능과 열정을 보였고, 16살에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소속으로 프로 경기에 뛰게 된다. 판잣집에 살다가 구단이 제공한 아파트로 이사한 가족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마라도나는 ‘반드시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마라도나는 힘들게 축구하는 무명 선수들에게 늘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그를 영입한 도나도스의 안토니오 누녜스 회장은 “마라도나는 선수들을 아버지같은 마음으로 대한다. 루고 선수가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알고 나서는 ‘그를 주전에 합류시킬 테니 급여와 계약 사항을 조정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고 전했다.

“축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위”

멕시코와 미국 등의 부호들이 참석한 ‘후원의 밤’에서 마라도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노력은 축구와 스포츠뿐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집집이 차고 넘치게 가졌으니까요.”

후기리그에서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도라도스는 결승에서 또다시 산루이스를 만난다. 마라도나와 선수들은 설욕 의지에 불탔지만 결국 무릎을 꿇고 만다. 마지막 미팅 때 마라도나는 선수 하나하나를 안아주며 말한다. “날 다시 살려줘서 고맙다. 너희 실력을 너희가 믿어야 해. 내가 그랬으니까. 축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위야.”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마라도나는 2020년 11월 3일 뇌출혈로 수술을 받는다. 11월 25일 ‘축구의 신’은 하늘 그라운드로 돌아갔다.

김정남 “마라도나 파울로 안 막았으면 10골 먹었을 것”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허정무와 격돌한 마라도나. [연합뉴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허정무와 격돌한 마라도나. [연합뉴스]

‘펠레가 낫냐 마라도나가 낫냐.’

축구팬들의 해묵은 논쟁거리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끈 김정남 감독의 견해는 다수 축구 전문가 의견과 일치한다. “은퇴 후 사회활동과 사생활 등을 고려하면 펠레가 더 위대하다. 그러나 축구 실력만으로 본다면 마라도나 쪽으로 기운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 첫 상대가 마라도나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였다. 김 전 감독을 만나 당시 얘기를 들었다.

“멕시코에 입성한 뒤 늘 듣는 질문이 ‘마라도나를 어떻게 봉쇄할 건가’였어요. 저는 ‘투망 작전으로 막겠다’고 했죠. 발이 빠르고 힘이 좋은 김평석에게 ‘너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마라도나만 꽁꽁 묶어라’고 했어요. 김평석이 좀 독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얌전한 겁니다. 전반에 두 골을 먹고 마크맨을 허정무로 바꿨죠. 허정무는 유럽(네덜란드) 경험도 많고 독종 기질이 있었어요. 반칙 아니고는 마라도나 볼을 뺏을 수가 없었지요. 10번도 넘게 파울로 마라도나 볼을 끊었는데, 안 그랬으면 전부 골 먹었을 겁니다.”

한국은 한 골을 더 허용했지만 마라도나에게 골을 먹지는 않았다. 후반 28분 박창선의 중거리슛으로 월드컵 첫 골도 넣었다. 한국은 1-3으로 졌고, 아르헨티나는 승승장구하며 월드컵을 차지했다.

당시 허정무(현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가 마라도나의 허벅지를 걷어차는 장면(사진)이 외신에 실려 “태권 축구를 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두 사람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감독으로 다시 만났다. 한국은 ‘마라도나의 재림’이라 불린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에 1-4로 졌다.

허 이사장은 “내가 반딧불이었다면 마라도나는 태양 같은 선수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축구 전문가들은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득점과 패스, 경기 운영 모두 특출했다’ ‘팀의 멱살을 잡고 86월드컵 우승과 이탈리아 나폴리의 리그 우승 및 UEFA컵 우승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마라도나를 축구 역사상 최고 선수로 꼽는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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