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108번뇌의 귀환"…지도부도 못 말린 與 법관 탄핵

중앙일보

입력 2021.01.29 16:00

업데이트 2021.01.29 16:08

“열린우리당 시절 108번뇌가 떠올랐다.”

29일 더불어민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법관 탄핵 문제를 논의한 전날 화상 의원총회의 모습을 이렇게 총평했다.  ‘108번뇌’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역풍을 타고 17대 국회에 입성한 108명의 초선 의원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이들이 국가보안법ㆍ이라크 파병ㆍ한미FTA 등 굵직한 현안마다 당 지도부 또는 정부에 반기를 들며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참석 의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29일 의총은 10분 여에 걸친 김영진 원내수석부대표의 우려로 시작했다. 김 원내수석은 “전투에 이기더라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며 “긴 터널(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을 어렵게 뚫고 나왔는데 왜 다시 그 터널로 들어가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탄핵안을 단독 표결하면 2월 임시국회의 파행이 불가피하고, 정쟁을 유발하는 모양새 때문에 지지율 회복세도 꺾일 수 있다는 우려였다. 한 참석 의원은 “김 수석이 지도부의 의견을 대표한 셈이지만 초선들 중심의 강경론은 통제불능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이탄희 민주당 의원(가운데)이 류호정 정의당 의원(오른쪽) 등과 사법농단 법관탄핵을 제안했다. 연합뉴스

지난 22일 이탄희 민주당 의원(가운데)이 류호정 정의당 의원(오른쪽) 등과 사법농단 법관탄핵을 제안했다. 연합뉴스

묻지마 탄핵…당권주자 송영길ㆍ홍영표가 현실론 제압

민주당 내 법관 탄핵 소추 움직임은 진보성향 법관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인 이탄희ㆍ이수진(동작을) 의원과 박주민ㆍ김용민 등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출신 소장파들이 주도해 왔다. 이탄희 의원은 지난 22일 기자회견에서 “법원이 1심 판결을 통해 반헌법행위자로 공인한 판사들”이라며 임성근ㆍ이동근 두 판사를 탄핵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가 지난 27일 의총에서 “탄핵 발의후 72시간 뒤면 무조건 표결해야 돼 3일이면 끝난다”며 속전속결론을 편 데 이어 28일엔 김용민 의원이 강경론을 설파했다.

의총에선 “탄핵 대상인 임성근 부장판사의 임기가 2월 28일로 종료돼 헌법재판소에 가도 각하될 것”이라는 현실론과, “탄핵안을 단독 처리하면 또 '입법독주'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는 차기 당권 주자인 송영길ㆍ홍영표 의원이 나서면서 쑥 들어갔다고 한다. 송 의원은 “법관탄핵은 헌법이 국회에 부여한 의무”라며 “이걸 안 하면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홍 의원은 “지도부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이걸 안하면 지도부가 곤혹스러울 것”이라는 취지로 지도부를 압박했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기소조차되지 않은 이동근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은 결국 각하될 것”(김 원내수석)이라는 우려가 반영되며 탄핵대상이 임 부장판사 1명으로 좁혀진 걸 빼곤 강경론이 압도한 분위기였다.

차기 민주당 당대표에 도전할 것으로 전망되는 홍영표, 우원식, 송영길 의원(사진 왼쪽부터). 연합뉴스

차기 민주당 당대표에 도전할 것으로 전망되는 홍영표, 우원식, 송영길 의원(사진 왼쪽부터). 연합뉴스

이낙연 대표는 28일 밤 10시30분쯤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대한민국 사법체계를 수호해야 할 판사의 위헌적 행위를 묵과하고, 탄핵소추 요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국회의 직무유기가 될 것”이라며 “법원에서 그런 위헌적 농단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심 끝에 탄핵소추를 인정하기로 했다”고 썼다.

임 부장판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을 제기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일본 산케이 신문 기자의 재판(2015년 12월)을 앞두고 미리 판결 내용을 보고받고 수정을 주문했다는 혐의 등(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으로 기소됐다가 지난해 2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문에 등장하는 “피고인의 재판관여행위는 피고인의 지위 또는 개인적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라는 표현이 여당 탄핵 주장의 유일한 근거다.

그러나 정작 임 부장판사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민주당 의원은 많지 않다. 탄핵 찬성입장인 한 초선 의원은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잘 모른다”면서도 “탄핵은 역사적 책무”라고 말했다. 수도권 재선 의원은 “임 부장판사의 이름도 처음 들었다는 동료들도 있다”고 했다. 민주당의 한 비주류 재선 의원은 “두 당권주자가 나서면서 탄핵에 반대하면 반개혁으로 찍히는 분위기가 완성됐다”며 “반대 의견을 가졌어도 본회의에서 반대 표결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2월 국회 파행 불가피…이낙연 ‘통합’행보도 먹구름

여야 관계도 급랭하고 있다.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살풀이식 창피주기’라든지, ‘법원의 코드인사와 판결을 이끌기 위한 길들이기’ 탄핵이라고 밝혀진다면 감당하기 힘든 국민적 역풍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혜진 국민의당 대변인은 “3권 분립의 대원칙을 3권 통합의 All in one(올인원,일체형) 권력으로 탈바꿈 시키려는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국민의힘 법제사법위원들도 “의석수만 믿고 사법부를 길들이려는 획책”이라는 성명을 냈다.

야당 서울시장 후보들의 어조는 한층 격했다. 나경원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 정권이 이성을 상실하고 권력장악의 광기에 빠져 있다”며 “삼권분립이 깨진 대한민국의 국민은 굴종과 복종을 강요 당할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이 1심에서 의원직 상실형을 받은 날 민주당이 판사 탄핵을 들고 나왔다.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다”라며 “자기 진영에 불리한 판결을 하는 판사들을 대놓고 위협해 길들이고 재갈을 물리겠다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6일 김경수 경남지사의 항소심(댓글조작 혐의), 지난해 12월23일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의 1심(표창창 위조 혐의 등) 등에서 유죄 판결이 날 때마다 민주당에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판결”(11월6일 강선우 대변인)“의심의 정황만으로 유죄판결을 했다”(12월24일 김종민 최고위원) 등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9일 부산시장 보궐선거 예비후보자 3명과 함께 부산 중구 야시장으로 유명한 부평깡통시장을 방문해 부산어묵을 구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9일 부산시장 보궐선거 예비후보자 3명과 함께 부산 중구 야시장으로 유명한 부평깡통시장을 방문해 부산어묵을 구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민주당은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안을 2월 임시국회의 첫 본회의(2월 3일)에 표결에 붙일 전망이다. 법관 탄핵안은 대통령(과반 발의, 3분의2 가결)과 달리 재적 의원 3분의1 동의로 발의할 수 있고 과반만 찬성하면 가결된다. 이탄희 의원실 관계자는 “탄핵안 준비는 끝났다”며 “2월1일 발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시국회는 파행이 불가피하게 됐다. 민주당은 코로나 19 손실보상제와 이익공유제와 관련된 ‘상생연대 3법’과 ‘사회적 경제 5법’ 등 103개의 법안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할 계획이다. 한 핵심당직자는 “탄핵만 아니었다면 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반대하기 어려운 법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이날 부산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에 가지 않았다. “2월 국회 입법 구상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원내대표실 관계자)는 이유였다. 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론 등 연초부터 ‘통합’을 새 키워드로 내세웠던 이 대표의 대권 행보에도 빨간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 대표와 가까운 민주당 인사는 “통합론이 무색해질 위기”라고 말했다.

임장혁ㆍ성지원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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