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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월드]취임식장 '털장갑 노인'…Z세대는 왜 '비주류' 샌더스에 열광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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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그가 취임식을 훔쳤다.”  

지난 20일(현지시간) 열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버니 샌더스(79) 상원의원이 뜻밖에 화제를 모으자 나온 외신 반응입니다.

낡은 패딩에 알록달록한 털실 장갑, 여기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샌더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비주얼 쇼크’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엔 너나없이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미국 주요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선명한 대조를 넘어 비현실적인 미디어아트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들 게 만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불만 가득한 할배’ 이미지에 열광한 건 젊은 디지털 세대였습니다. 이른바 ‘샌더스 밈(meme·인터넷 따라 하기)’이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졌습니다.

열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홈페이지에서 판매하는 티셔츠 등 이른바 ‘샌더스 굿즈’도 닷새간 2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CNN은 “샌더스가 대선 후보 경선에선 졌지만 상품 매출에선 이겼다”고 논평을 했습니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나섰다가 중도 포기한 걸 언급한 겁니다.

샌더스의 이미지가 젋은층에 인기를 끌자 미국 최대 상거래사이트 아마존은 광고성 게시물에 이 사진을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평소 샌더스가 아마존을 대표적 '악덕 기업'이라고 맹비난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죠.

79세의 ‘진보 아이콘’ 샌더스와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젊은 Z세대의 결합은 흥미롭습니다. 물론 Z세대에겐 일시적인 흥미나 놀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세대를 뛰어넘는 공통분모들도 보입니다. 기존 질서와 현실에 대해 불만 가득한 ‘아웃사이더’라는 점이 대표적이죠.

기존 질서에 반감… 샌더스와 MZ세대 잇는 공통분모  

지난 2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의사당 앞에서 열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그의 사진을 이용한 ‘샌더스 밈(meme) 놀이’들. [AFP=연합뉴스, 트위터 캡처]

지난 2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의사당 앞에서 열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그의 사진을 이용한 ‘샌더스 밈(meme) 놀이’들. [AFP=연합뉴스, 트위터 캡처]

취임식에서의 샌더스의 옷차림은 그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그의 분명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화제가 된 장갑은 2년 전 한 지지자가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실과 스웨터로 만들어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친환경’이란 진보 어젠다를 상징하죠.

점퍼 차림에 대한 해명에선 남들이 뭐라든 신경 안 쓴다는 '비주류'의식도 드러납니다. “버몬트(샌더스의 지역구)에서는 따뜻하게 입는다. 우리는 추위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패션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취임식 당일 샌더스를 찍은 사진 기자도 “샌더스 의원의 정치가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밈 현상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밈’이 활용되는 양상을 보면 젊은 세대가 더욱 주목한 건 그 날의 뚱한 표정과 불만스러워 보이는 자세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합성된 샌더스를 앉혀 놓으며 대리 만족을 얻는 모습을 보입니다.

워싱턴포스트(WP)도 “세계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경제·사회적 분열을 겪으며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누리꾼들이 샌더스 의원의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에 정치인과 정치 체제에 대한 반감을 투영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코로나 양극화’가 다시 소환한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버니 샌더스의 선거 유세장에 나온 Z세대 젊은이들의 모습. 샌더스는 지난해 4월8일 결국 경선을 포기했다. [AFP=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버니 샌더스의 선거 유세장에 나온 Z세대 젊은이들의 모습. 샌더스는 지난해 4월8일 결국 경선을 포기했다. [AFP=연합뉴스]

샌더스는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 입학 전까지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가족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희생됐습니다. 모친인 도로시 샌더스는 평생 “내 집 장만이 꿈”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방 2개짜리 월세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죠. 샌더스는 이런 환경이 “가난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 경제적 계급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정치인이 돼서도 법인세 인상, 금융기업 CEO 연봉 제한 등을 내세우며 재계와 부딪혀왔습니다.

이런 샌더스를 향한 ‘이상 열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2016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힐러리 클린턴을 맹렬히 추격하며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공고한 양당체제, 거기에다 사회주의를 금기시하는 미국에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아웃사이더 정치인이 만들어낸 상황에 모두가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해 치러진 대선 본선의 승자는 도널드 트럼프였습니다. 샌더스와는 정반대 성향이지만 그 역시 주류 정치권에선 또다른 ‘아웃사이더’였죠. 샌더스의 돌풍과 트럼프의 당선이 결국 미국 정치의 양극화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해석이 힘을 얻었습니다. 기존 양당체제로는 분출하는 정치적 욕구를 흡수하기 어려운 정치적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죠. 낙승이 예상됐던 힐러리 클린턴의 충격적 패배도 샌더스 지지층의 온전한 지원을 얻지 못한 것이 패착 중 하나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 경선 이후 샌더스 진영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일찌감치 공을 들인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지난 2018년 하원 선거에선 히스패닉이며 미 최연소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31), 매사추세츠주의 첫 흑인 여성 의원인 아이아나 프레슬리(46) 하원의원 등을 필두로 한 ‘샌더스 키즈’가 잇따라 의회에 입성하기도 했습니다. 샌더스로 대변되는 진보진영이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커진 중요한 배경으로 지목되는 건 심화하는 경제적 양극화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여기에 다시 기름을 부었습니다. WP에 따르면 코로나19 유행으로 시행된 각종 방역 조치로 미국 내 실업률은 3.5%에서 6.7%로 상승했습니다. 특히 저임금 서비스직 노동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죠. 반면,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의 ‘불평등 바이러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세계 억만장자들의 총자산은 11조9500억 달러(약 1경 3000조)가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4번의 버몬트 주지사‧상원 의원 선거 낙선을 겪으면서도 정치 노선을 지킨 샌더스는 버몬트주 하원 8선 의원을 거쳐 2006년부턴 상원까지 진출하면서 미국 좌파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AFP=연합뉴스]

4번의 버몬트 주지사‧상원 의원 선거 낙선을 겪으면서도 정치 노선을 지킨 샌더스는 버몬트주 하원 8선 의원을 거쳐 2006년부턴 상원까지 진출하면서 미국 좌파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AFP=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버니 브로스(Bernie Bros·버니의 형제들)’의 주축이 된 미국의 저소득·저학력의 젊은 층에겐 취임식 당일 128년째 대대로 간직한 성경에 선서하는 주류 출신 대통령 바이든보단 브루클린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샌더스가 어쩌면 더 가깝게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이런 기성 질서에 대한 젊은층의 반발은 비단 정치권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최근 뉴욕증시에서 공매도를 시도하던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개인투자자도 소셜미디어에서 모인 밀레니얼과 Z세대, 이른바 ‘MZ세대’라는 분석입니다.

바이든과 샌더스, 미묘한 줄다리기

바이든 정부 출범을 앞두고 그에게 적극 지지 의사를 표명했던 샌더스의 행방이 주목됐습니다. 입각 가능성도 거론됐죠. 지난해 9월 샌더스 측 관계자는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에 진보주의자들을 무시한다면 ‘엄청나게 모욕적’일 것”이라며 내각에서의 활동을 요구했고, 11월엔 샌더스 스스로 “내가 노동자 가족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하는 직을 맡을 수 있다면 나는 할 것”이라며 노동장관 제안 시 수락하겠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죠. 

그러나 바이든의 선택은 마티 웰시 보스턴 시장을 노동장관에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이 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석 하나를 빼는 게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하지만이를 두고 미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샌더스가 노동장관이 된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란 해석도 내놨습니다. 중도 성향의 바이든 진영 주류의 입장에서 급진적인 샌더스의 내각 참여는 아무래도 부담이었을 것이란 취지입니다. 취임식장에서의 뚱한 표정은 그런 맥락에서 진보진영이 바이든 행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3월 제46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 선출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AP=연합뉴스]

지난해 3월 제46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 후보 선출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AP=연합뉴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에서 샌더스가 단순히 ‘털장갑 노인’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상원 예산위원장을 맡게 되면서죠. 미국에서 의회는 예산 편성에 독자적 권한을 갖습니다.

당장 바이든 행정부가 사활을 거는 1조9000억 달러(약 2099조5000억원) 규모의 코로나19 구제법안이 의회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죠. 상원에 상정된 법안이 통과되려면 60표가 필요한데 현재 미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절반씩(50석) 차지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상원 예산위원장은 단순 과반으로도 개별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조정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에 샌더스는 우선 “공화당이 구제법안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예산조정권 전술을 사용하겠다”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구제안) 회부에 몇 주, 몇 개월을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행동해야 한다”며 바이든에 힘을 보태고 나섰습니다.

향후 바이든과 샌더스의 행로가 어떻게 이어지고 엇갈리게 될지도 주목됩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 불평등, 의료 문제가 대두된 만큼 상황이 종식되고 본격적인 국가채무 논의가 나오기 전엔 샌더스가 추구했던 대규모 재정 정책과 바이든의 방향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79세로 더이상 대권을 바라보기 힘든 샌더스는 상원 다선 의원으로 남아 민주당 내 진보 세력의 중심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높다”며 “정치 개혁과 전 국민 건강보험(메디케어포올)의 관철을 위해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버니 샌더스 정치 타임라인

■1941년 9월8일 뉴욕 주 브루클린 폴란드계 이민노동자 가정에서 출생(유대인이지만 “조직화된 종교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WP 인터뷰)는 입장)
■1959년 “내 집 장만이 꿈”이라고 했던 모친 사망(당시 방 2개 월세 아파트 거주)
■1963년 8월28일 스티브 잡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 참석
■1972년 버몬트주 연방 상원의원‧주지사 선거 낙선
■1981년 버몬트주 벌링턴 시장 경선 무소속 승리(당시 2위 후보와 10표차)
■1981~1989년 벌링턴 시장 4선
■1991~2007년 버몬트주 하원 의원 8선
■2006년 버몬트주 상원의원 선거 65% 득표로 승리(2007년부터 현재까지 상원 의원 재직 중)
■2008년 월스트리트 금융 기업 CEO 고액 퇴직금 저지 탄원서 제출
■2010년 12월10일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 시절 감세 복원 반대 8시간 필리버스터
■2015년 4월30일 미 45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출마 발표
■2015년 5월1일 선거캠프 처음 24시간 동안 150만 달러 이상 모금
■2016년 1월17일 연간 1조3800억(1521조 5880억원) 달러 규모 “메디케어-포 올(Medicare-For All·전국민 건강보험) 발표
■2019년 2월19일 미 46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출마 발표
■2019년 8월22일 16조3000억 달러(1경7972조) 규모 ‘그린 뉴딜’ 계획 공개
■2020년 2월 46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경선 여론조사 1위 올라
■2020년 4월13일 조 바이든 대통령 후보로 지지 선언
■2021년 1월 상원 예산위원장 취임

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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