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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추격꾼, 강도 두목, 주모…바닥 인생들의 사랑과 의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43)

신대륙 미국을 상징하는 것은 정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드라마나 영화 부문에서는 서부극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지요. 먼지 자욱한 황야에서 말을 달리며 악당을 처단하는 시크한 총잡이. 악을 응징하는 선악 구도와 억척스레 서부를 개척하는 미국인의 끈질긴 삶이 녹아있는 서부극은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배경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여준 마초 연기도 기억나거든요.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Flickr]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Flickr]

1910년 푸치니가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초연한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는 스파게티 웨스턴 같은 작품이지요. 미국 서부 개척시대, 황금을 찾아 미지의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모두가 몰려들어 일확천금을 꿈꾸던 사람들. 광산촌의 술집 주인인 미니, 도적떼 두목인 라마레즈. 그들은 대부분 기존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버려지거나 바닥 인생을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허나, 그들에게도 따스함은 남아있었지요. 그 마음속에서 꽃피운 사랑과 의리, 그리고 인간애를 푸치니 스타일로 오페라 곳곳에 풀어놓았답니다.

황야의 무법자가 결투하는 듯한 서곡이 흐르고, 광산촌의 술집입니다. 힘든 일과를 마친 사람들은 시가와 보드카를 즐기며 카드게임도 시작합니다. 가수가 고향 노래를 부르자, 모두 고향을 그리며 상념에 젖어 들지요. 향수병에 걸린 짐은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귀향하겠다고 하고 동료들은 그를 위해 여비를 모아줍니다.

현상범 추격꾼이 광부들에게 도적 두목 라마레즈의 체포 영장을 보여주며, 자신이 그를 추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술잔이 돌고 주먹다짐이 벌어지며 술집은 한바탕 소동이 일지요. 그때 총성과 함께 강한 모습의 미니가 등장하자 상황은 절로 정리된답니다. 모두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이지요.

보안관 랜스는 미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거금 1000달러를 주겠다며 결혼하자고 하지만, 미니는 고백이 경박함을 충고합니다. 랜스는 나름대로 마음을 표현하며 고백하지요. 오래전 고향을 쓸쓸히 떠났고 외로웠던 삶을 살았다며, 미니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큰돈을 쓸 수 있다고요. 미니는 사랑이란 조금 다른 것이라며, 어릴 적 다정하고 행복했던 가족을 떠올립니다.

라마레즈가 나타나 자신을 딕 존슨이라고 거짓 소개합니다. 보안관인 랜스가 대놓고 이방인인 그를 경계하며 자극하자 광부들도 동조하며 분위기가 험악해지지만, 미니가 존슨을 안다면서 보증하자 단번에 상황은 호전되지요. 이전에 미니는 존슨을  우연히 만나 호감을 나누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모두 추격꾼을 도와 라마레즈를 체포하러 나가자, 미니는 황금 보관함을 존슨에게 보여주며, 광부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존슨의 부하가 황금을 훔치는 작전을 짜고 휘파람으로 신호하기로 했기에, 밖에서 부하들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만 존슨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존슨은 그녀의 오두막집에서 다시 만나자며 “당신은 천사의 얼굴을 지녔소”라고 그녀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해주자 그녀는 감동하지요.

미니는 집에서 존슨을 기다리며 최대한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습니다. 존슨이 도착해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 외진 곳에 홀로 사는 그녀의 생활을 염려하자 그녀는 오히려 행복하게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지요. 남자들은 사랑에 빠져도 한 시간 밖에 가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미니에게, 그는 그 한 시간을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하기 위해 남자들은 기꺼이 죽음도 불사한다며 애정을 과시하지요.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점점 빠져드는 두 사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드는 미니와 존슨. [사진 Flickr]

서로에게 점점 빠져드는 미니와 존슨. [사진 Flickr]

밤이 깊어졌는데 느닷없이 랜스와 광부들이 들이닥치고, 미니는 급히 존슨을 숨깁니다. 그들은 존슨이 강도 두목이라며 그녀의 안위를 걱정해줍니다. 그리고 존슨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말에 충격받은 미니.

숨어있던 존슨이 나오자, 자신의 진심과 사랑이 농락당했다고 생각한 미니는 그에게 무엇을 훔치러 왔느냐고 다그치지요. 존슨은 진심 어린 해명을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가족을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되었다고요. 그렇지만 미니를 만난 뒤에는 그녀와 사랑과 정직한 노동으로 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니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되었으니 그 꿈도 물거품이 되었다며 좌절하지요.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작별인사를 하고 떠납니다.

잠시 후 총을 맞아 부상을 입은 존슨을 발견한 미니는 그를 다락방에 숨겨줍니다. 그는 거절하지만, 그녀는 첫 키스를 나눈 남자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답니다. 그녀는 존슨을 품에 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연인인 미니를 빼앗긴 듯 흥분한 광부들은 존슨을 잡아 강도질과 살인죄를 물어 교수형에 처하기로 합니다. 절망적인 존슨은 미니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하지 말아 달라며, 유언 같은 아리아 ‘자유로운 몸으로 멀리 떠났다고’를 감동적으로 부릅니다.

존슨의 목에 동아줄을 메는 순간, 미니가 총을 들고 나타나지요. 과거 강도였던 존슨은 자신의 오두막에서 이미 죽었다며 그를 구명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동안 광부들을 위해 헌신해 온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각별한 인연과 사연 그리고 추억을 떠올리며 설득을 합니다. 이 감동적인 설득에 모두 그녀 편이 되지요. 그녀는 모든 광부의 여자이자 친구, 그리고 형제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위해 떠나면서 막이 내려집니다.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픔을 갖고 있지요. 그럼에도 그들에게 따스한 정이 남아있습니다. 오히려 뜨거운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지요. ‘서부의 아가씨’는 소외당한 삶 속에서 꽃피운 사랑과 의리, 그리고 인간애를 푸치니의 사실적인 음악으로 보듬어준 위로의 오페라랍니다.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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