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의 인프라

[김기찬의 인프라] 한-EU FTA 노동분쟁이 남긴 함정

중앙일보

입력 2021.01.27 09:30

업데이트 2021.01.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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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을 근거로 EU 측이 제기한 분쟁해결절차가 25일 전문가 패널의 보고서로 사실상 일단락 됐다. 패널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은 노력조항으로, 한국이 FTA 협정문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다. EU가 분쟁절차를 개시(2018년 12월)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노력조항을 의무조항으로 해석하고 압박했으니 말이다. EU와 FTA를 맺은 국가 중 이를 이유로 분쟁절차가 진행된 건 한국이 유일하다.

[현장에서]

분쟁절차 시작되자 항의 한마디 안 해
공약 띄울 호재로 활용한 의심 사

분쟁 일단락되자 강한 유감 표명
'노력'을 '의무'로 포장해 압박한다는 것

FTA 상으로는 '노력'조항이지만
ILO 협약 비준하면 '의무'조항
정부, "ILO 협약 2월 비준 노력" 밝혀
ILO 협약에 유감표명한 꼴이 돼

대체복무에 ILO는 "협약 위반"
정부 "선택권 주면 위반 아냐"
위반 판단 ILO 몫…바뀐 적 없어
정비 없이 비준하면 국제제재 초래

처음 분쟁절차가 개시됐을 때 정부로선 이용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ILO 핵심 협약 비준)을 띄울 절호의 기회로 삼은 듯했다. 무역분쟁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EU에 항의 한마디 하지 않았다. "노력하고 있다"고 해명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노출했다. 어쩌면 EU의 문제제기가 여론을 자극하기에 호재였을 수 있다. 분쟁절차가 마무리되기 직전, 노조법이 통과됐다. ILO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한 정지작업을 마친 셈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019년 4월 9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집행위원과 면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2019년 4월 9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세실리아 말스트롬 EU 통상집행위원과 면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인지 정부가 돌변했다. 분쟁절차가 개시되고, 진행될 때와 달리 25일 느닷없이 '유감'을 표명했다. 패널 보고서에 대해서이지만 일각에선 "노조법 통과로 EU와의 분쟁이 효용가치를 거의 다했다는 판단이 선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렇다고 EU의 주장을 완전히 내치지는 않고 있다. 그래도 아직 쓸만한 구석이 남아 있어서다. ILO 핵심협약 비준이다.

정부가 유감을 표명한 건 패널 보고서에 포함된 권고사항에 대해서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노조 간부를 종업원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도록 그 선임 권한을 노조에 맡기라는 대목이다. 기업별 노조가 주를 이루는 한국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들다. 정부는 "노력 조항을 의무인양 압박한다"고 봤다.

한데 정부가 이렇게 강한 유감의 뜻을 표명한 게 앞뒤가 영 맞지 않는다. 박화진 고용노동부 차관이 이날 패널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ILO 핵심협약이 2월 국회에서 비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패널이 권고한 사항은 FTA 상으로는 '노력' 조항이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면 '의무'가 된다. '유감 표명'의 대상이 안 된다. 무조건 지켜야 한다. 안 지키면 무역보복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게 된다. 패널 보고서의 권고가 역설적으로 ILO 핵심 협약 비준의 함정을 안내해준 셈이자, 정부가 ILO 핵심협약에 유감을 표명한 꼴이 됐다.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면 어렵게 통과된 노조법도 상당 부분 효력을 잃는다. ILO 협약이 법률적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신법(新法) 우선의 원칙에 따라 기존 노조법과 배치되거나 충돌하는 사안은 ILO 협약을 적용하게 되고, 노조법의 관련 조항은 폐기 또는 정지되는 운명에 놓인다. 한·EU 전문가 패널이 한국에 한 권고도 '노력'이 아닌 '의무'가 된다. 아무리 유감을 표명해봤자 소용없다. 따라야만 하는 법적 효력을 갖는다.

ILO 총회 장면

ILO 총회 장면

이뿐 아니다. ILO 핵심협약이 비준되면 군 복무 대신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산업기능요원, 사회복무(공익근무)요원, 예술체육요원, 공익법무관 등 대체복무 중인 사람이 군대에 가야 하는 운명에 처할 수 있다. 교도소 재소자들이 외부 위탁을 받아 물건을 만들거나 통근생산하는 식의 재활활동도 금지된다. 강제노동금지 협약을 위반하는 행위여서다. 싼 값으로 노동력을 이용한다고 본다. 군 운영과 재소자 재활 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에 대해선 손을 놓은 상황이다. 이를 문제 삼아 통상 압력 등 국제적인 제재가 가해지면 어떻게 감당하려 하는지 의문이다.

정부는 민감한 군 복무 문제와 관련해선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현역으로 복무할 것인지,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할 것인지 당사자가 선택하도록 선택권을 주면 문제가 없다"는 해석을 내놨다. '누가 현역 복무를 택하겠는가'라는 비아냥은 둘째 치고, 이건 정부 자체 해석일 뿐이다. ILO 협약 위반 판단은 우리 정부가 아니라 ILO가 한다. 우리가 문제없다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ILO는 이 문제와 관련, 한국처럼 강제징집하는 터키와 이집트가 필요 인원을 초과한 징집병을 공기업이나 사기업에 배치하자 '위반'이라고 판정했다. 2007년 8월 한국의 질의에도 같은 대답을 이미 회신했다. 2009년과 2012년 ILO 이사회에서 물었을 때도 ILO는 같은 답을 했다. '군사적 목적과 관련이 없는 것은 병역 의무로 볼 수 없다. ILO 협약 위반이다'고 한국 측에 전했다. 이런 ILO의 입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적 없다.

정부가 현 정부 이전까지 "ILO 협약 비준이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느닷없이 '군 복무 선택권'을 내세워 "ILO 협약 위반이 아니다.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판단의 주체인 ILO를 젖혀두고, 문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하려 국제사회의 규범조차 짜맞추기식으로 해석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학계 등에서 이런 정부의 갈라파고스식 해석으로 통상문제와 제재가 불거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하는 건 이 때문이다. 자칫하면 통상 압력의 트랩을 우리가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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